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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와서 컴퓨터 인터넷 뉴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는데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을 봤다. 그런데 점심시간 쯤에는 그것이 잘못된 소식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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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월 갑작스런 사고로 가족을 보냈습니다. 상상 밖이었던 이별과 부재는 오로지 견뎌야할 남은 자의 몫이었습니다. 4월의 손짓에도 마음은 겨울 어디 쯤을 헤매고 있었던 그 날 아침 출근하고 얼마 안되서 직장동료로부터 사고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수학여행 가던 고2 학생들이라는 소식에 "어떻게 해"라는 말만 나왔습니다. 그러나 곧 전원구조라는 기사가 떴다는 말에 안도하였습니다. 고2 때 큰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과 배안에서의 설레임이 생생하여 다른 무엇을 보태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구조시스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후 즈음 들려 온 소식은 전원구조가 아니라고 했고 학생 1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생각했고 배 위에 승객이 많아 구조가 늦어지는 것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 날 제 7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곧 구조된 학생들과 학부모의 상봉장면을 기대하며 퇴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은 물속에 갇혀 죽어갔습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국가의 어떤 구조도 없이 학살당했습니다.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TV를 보다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도 울음은 시시때때로 덮쳐왔습니다. 가족을 갑작스레 보낸 아픔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더해져 유가족의 감정에 이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유가족에 대한 저열한 횡포와 탄압은 슬픔을 넘어 깊은 분노와 물음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정의가 있는 것인지? , 인간됨이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 그 이후 제 삶은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세월호 분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 아침 설레임 가득했을 아이들을 볼 용기가 없고 차마 이대로 보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를 인양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그 연루자들을 모두 단죄할 때 이 땅의 정의는 다시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다시 정의가 세워진 그 날 아이들을 보겠습니다. 자식잃은 부모의 애간장이 녹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면 몇 번은 차고 넘쳤을 테지요. 세월호 모든 가족들 사랑합니다. 더 크게 웃고 더 뜨겁게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보내지 않았으니 이별 또한 없는 것, 아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으니까 아이들 몫만큼 더 당당하고 행복하셔야 합니다. 늘 마음으로나마 함께 하겠습니다그 날 7시간을 잊은 자는 악마입니다. 그러나 그 날 제 7시간은 생생하고 또렷합니다. 그 7시간은 정의가 강물처럼 되살아오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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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이 안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로 접하고 저는 왜? 어떻게? 그날을 잊을수 있지? 나처럼 매일매일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그날, 슈퍼에서 만나 서로 눈물글썽이며 이야기를 나눈 동네아줌마가 누구였는지도, 첫 뉴스를 접하고 혹 지인의 아이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전화통화를 한 친구가 누구였는지도, 쓰나미같은 하루를 보낸 저녁에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즐거운 일상을 밴드글에 올린 지인이 누구였는지도, 내가 그에게 갑작스럽게 분노하며 쏟아냈던 혼잣말까지도 기억합니다. 너무 사사로운 일들이라구요? 맞아요. 정말 사사로운 일, 어제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사사로운 일상의 반복인 주부의 삶에서도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일만은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날이 기억안날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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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전 둘째를 임신하고 있어서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갔다가 대기실에서 앉아서 뉴스에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너무놀라서 계속 뉴스를 보고 있다 검진을 받고도너무 걱정이 돼서 집을 못가고 뉴스를 계속보고 있다전원구조라는 소식이 나오자 그걸보고 집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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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후 전원 구조했다고 들었을때 무척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게 아니라는게 알려지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전 세월호와는 어떤 열관도 없지만 이상하게 그 말만 나오면 눈물이 나고 화가 납니다 우리 어른들이 조금만 신경썼으면 그런 안타까운 일은 없어요 앞으로 죽을때까지 잊지말고 기억하겠습니다 마음에 꼭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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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에 믿을수 없는 뉴스를 접하고 제가 처음든 생각은 큰일이지만 아직 사람을 구할수 있겠구나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후에 우왕좌왕하는 언론보도와 정부의 발표 어떤것이 진실인지 알기 힘든 상황에서 어느순간 알게된 희생자들의 소식.혼자 살고 잠시 일을 쉬고있을때여서 집에서 하루종일 뉴스만 바라보고 있던. 나혼자 발 동동구르던 그기억 이제는 알고 싶습니다. 왜 내 예상과 달리 세월호는 그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는가. 세월호 7시간 뿐만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 모든것들. 그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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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된 첫 아이를 안고서 tv를 통해 사고장면을 처음 본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합니다.하루 종일 tv를 끄지 못한채, tv에서 눈을떼지 못한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이 어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지켜보며, 생때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가는것을 바라만보며, 무너지는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내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고 했던 그 하루가 너무나 생생해 잊혀지지 않습니다.다른 날엔 무얼했나 기억나지 않아도 그날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날의 제 감정까지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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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근직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업무상 컴퓨터에 앉아 있는게 힘들었었죠그런데중간중간 걱정이 되어 검색했던 뉴스, 그던 화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방송으로 그 장면을 보아야했던 순간....너무나 죄송합니다. 2년이 넘도록 아니 4개월만 있으면만 3년주년인데..실종자는 아직도 있고 더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아직도 세월호는 아직 그곳에 있다니..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닌가..하구요최근 뉴스를 보다가 "아직 있다"는 곡을 알게 되었죠.. 만2주년이 되어 초등학생들이그린 그림도 보았구요..삶에 바빠서 뉴스 보는 시간도 아끼고 살았던 시간..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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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두 아이 육아하면서 워낙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다보니 생긴 건망증... 목말라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도 왜 냉장고 문을 열었는지도 그 짧은 새에 잊어버리고 다시 냉장고를 닫아버릴 만큼 정신없어진 나도 그날 4월 16일에 뭘 했는지 똑똑히 기억합니다. 정신없이 아이들 아침밥 먹이고 유치원 보내고 나서 습관적으로 오전 뉴스를 틀었는데 거기 세월호가 침몰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어요. 수백명의 아이들과 민간인이 탑승한 배가 침몰 중이라는 뉴스에 크게 놀랐지만, 머지않아 큰 글씨로 "전원구조"라는 뉴스 타이틀이 뜨기에 안도했던 기억이 선명하구요. 그날 밤 탈출 생존자보다 실종자 명단이 더 많이 나와 의아해하면서도 몹시 충격이었던 기억도 또렷합니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여도, 4월 16일 만큼은 그날의 해가 질때까지 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과, 뉴스로 보고 들었던 장면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을 만큼 선명히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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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께복수는 반드시 할께박근혜를 비롯한 7시간 부역자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진실을 밝히고 죄를 물을께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악마같은 존재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최선을 다할께 사랑하다 미안하다 부디 편히 잠들길 바란다 다음 세상은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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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며 세월호가 조금씩 기울어진것을 들었습니다.제가 뉴스를 접했을때 는 정말 배가 많이 기울지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이 모두 구조될것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하지만 그 당연함에 비웃기라도하듯 구조를 하지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고 찍는 모습을 보며 의구심이 들었고 답답함도 느껴지더라구요.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하지않도록 대한민국의 수장을 뽑을때 어른들만만듣고 무조건 1번만 찍으면 침몰할 수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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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월호라는 단어가 들리면가슴 깊은곳에서 아픔이 올라옵니다.그 안에서 아이들이 고통속에서 있었을 시간을 잊을수 없습니다.누군가 감추고 싶었던 7시간을 우리는 잊을수 없는 시간입니다.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이 오보가 아니길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가...제발 그 안에서 살아있길 얼마나 기도했던가....너무 미안해서 광화문으로 ...안산으로.... 팽목항으로 잊을수 없습니다. 무슨 잘못이 그리 많길래 7시간의 행적을 관련 당사자들은 기억하기 싫어할까요?하지만 우리들은 7시간의 진실을 알고 싶기에 결코 잊을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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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고 있었습니다.티비는 객장 오른쪽 끝에 있었고 오전이라 은행에는 손님이 적어 한산했습니다배가 침몰했다니,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는데곧이어 "모두 구조"라 해서침몰 알리자마자 구조소식,뭐야ㅡ 이상했지만 어쨌거나 다행이구나손님처리를 계속했습니다.얼마지나지 않아 오보였다고 보도되고몇시간이 지나도록 배곁에는 망망대해ㅡ침몰하는것을 구경시켜주는것 같은 티비에 설마 설마하며 기다리는 손님들의 일을 계속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멍하게 집에와 저녁뉴스를 계속 보다가 이제 그만 자려고 방에 불을 껐는데, 순간 깜깜해진 방,바닷물 속에 지금 혹시 살아있는 아이들은 이보다 더 깜깜한 어둠에서,차가운 물안에서 간신히 호흡하고 무언가를 잡고 있겠구나 생각에 그제서야 눈물이 터지고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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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주부로서 여느때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전에 세월호 소식을 처음 들었을땐 늘 뉴스에서 보고듣던 그런 사고라 생각했습니다.한시간 두시간 지나며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점점 침몰해 가는 배를 마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황망함에 눈물이 어른 거림니다.저녁 그리고 밤늦도록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돋동 굴렀습니다.어.서.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데................숨이 막혀와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왜 7시간 뿐이겠습니까그다음날도 그다음날도 기억합니다.단순사고가 아닙니다.구할 수 있었던 아이들이 희생 되었습니다.진실은 침몰하지 않음을 믿습니다.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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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사무실. 어느 순간 동료가 제주도로 가던 배가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원 구조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는 수학여행을 갔던 아이들이 승객의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수학여행이 되겠다며. 그나마 밤새 친구들과 배에서의 추억을 쌓아 다행이라고. 한가롭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 사고의 진실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소식에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각자의 컴퓨터를 바라보며 하루종일 포털 메인을 새로고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일을 하나도 하지 못 하고 퇴근했습니다. 혹시 구하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 있을까. 그 하루는 피가 얼어붙고 가슴이 미어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퇴근 후 거의 밤을 새다시피 뉴스를 보며 멍해진 정신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밤새 배는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습니다. 그 밤은 그렇게 지금껏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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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나는 2016년 4월16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 서일주버스에 몸을 실었어요.전날 나는 지인의 빈소에 들러 조문을 드리고,,몇시간의 휴가를 얻어 제주에서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터였다.나에게 주어진 제주에서의 7~8시간 올레길을 걷고자 마음먹고, 모슬포항근처를 목적지로 ᆢᆢᆢ올레길 출발지점을 찾지못해 한참을 헤매다 스마트폰에서 세월호사고 소식을 접한다.비현실적인 그 망망대해의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사진한장ᆢ전원구조라는 뉴스 이후 마음을 쓰지않고 길을 걸었다..저녁을 먹기위해 찾은 식당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너무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그 비상식적인 정부의 대처, 골든타임을 그저 허망하게 보내고 수많은 귀한 생명을 떠나보낸 안타까움은 시작에 불과했다..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수학여행지,사고가 없었더라면 같은 시공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ᆢ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너무 아픈 단어일 제주,그날 잃어버린 그 7시간 난 제주에 있었다.그래서 더 죄스럽다. 이 시대를 함께 산 우리에게 세월호는 공동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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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자마자 무지 바쁘게 재료를 씻고 썰어놓느라 정신없던 1시간여가 지나고 잠시 쉬면서 있을때였습니다. 기사분이 속보가 터졌다고 하셨습니다. 수학여행간 아이들이 배안에 갇혔는데 뒤집혀있다고...온종일 그 뉴스에 붙들려있었죠. 빙빙돌기만하는 해군함정과 민간배들을 보며 방안이 있을거라고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두명도 아니고 삼백여명의 생명이 바다밑에 가라앉는 모습을 TV로 보고만 있어야했다는게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 멀리 지중해가 아닌 바로 우리 앞바다, 코앞에서 말입니다. 강에 아이가 한 명 빠져도 살리기위해 뒤도 안보고 뛰어드는게 인지상정인데, 민간잠수사들이 들어가는 걸 금지했다는 보도부터해서 비상식적인 재난대처를 하는 대한민국정부를 보면서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해마다터지는 안전사고에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내내 학교밖에서 실시하는 외부체험학습을 하지 못하고 졸업했습니다. 박근혜정부시절내내말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날, 그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찌 기억하지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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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여느 날과 같은 보통의 하루를 보냈다. 그날따라 자습하기가 너무 싫어서 그냥 일찍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수학여행가던 배가 가라앉았다는 뉴스를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당연히 다 구조될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와서 한참을 놀다가 해가 다 지고서야 TV를 틀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왜 실종자 수가 여전히 세 자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랑 둘이 뉴스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울면서 껐다. 엄마는 그 배에 있을 애들이 나랑 동갑이라서, 자꾸 내가 겹쳐보여서, 너무 슬프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뒤로도 한참을 뉴스만 보면 울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뉴스를 보며 울던 열 여덟의 나는 곧 스물 한 살이 된다. 대학생이 되어 걷게 된 4월의 캠퍼스는 너무나 예뻤고, 그래서 먼저 간 그 친구들의 삶이 사무치게 안타까웠다. 그 날, 모두가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했다면, 그 친구들도 나처럼 고3을, 스물을, 스물 하나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백명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삶을 빼앗겼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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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것이 안타깝지만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세월호 때문에 제주도 수학여행이 취소되서 원망하는 마음만 있었다 지금이라도 차가운 바닷속에 남겨진 언니 오빠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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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라디오 dj 입니다. 그 날, 전원구조 오보를 제 목소리로 방송을 통해 전했습니다.속보로 뜬 그 이야기를 빠르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보라는 것을 알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속으로 눈물만 흘렀습니다. 방송에서 제가 울 수는 없으니까요.그 날 방송국의 풍경, 조그마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다들 침묵하며 뉴스만 보던...집으로 돌아오는 도로는 지나치게 평화로워 이질적이었습니다.집으로 돌아와 아무 것도 먹지 못 하고 하루종일 뉴스만 봤습니다.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내 고향 제주도로 가던 아이들, 안산에서 자라던 내 사촌동생의 친구 동생들이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서 혼자 울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며칠 후 모든 방송을 그만두고 집밖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했죠.6개월을 그렇게 쉬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지금도 마이크 앞에서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정말 조심스럽습니다.최근까지 제대로 방송에 복귀하지 못하다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이제 겨우 본업을 정상적으로 시작하려 합니다.우리 시민들은 그 날이 이렇게 또렷한데, 아직도 그 날의 아픔이 생생한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위선자들은 대체 무엇인가요? 왜 그리 자기 자신을 속이나요.진실과 정의가 승리할 겁니다. 아주 작은 발걸음을 저는 그렇게 내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