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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에 믿을수 없는 뉴스를 접하고 제가 처음든 생각은 큰일이지만 아직 사람을 구할수 있겠구나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후에 우왕좌왕하는 언론보도와 정부의 발표 어떤것이 진실인지 알기 힘든 상황에서 어느순간 알게된 희생자들의 소식.혼자 살고 잠시 일을 쉬고있을때여서 집에서 하루종일 뉴스만 바라보고 있던. 나혼자 발 동동구르던 그기억 이제는 알고 싶습니다. 왜 내 예상과 달리 세월호는 그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는가. 세월호 7시간 뿐만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 모든것들. 그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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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된 첫 아이를 안고서 tv를 통해 사고장면을 처음 본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합니다.하루 종일 tv를 끄지 못한채, tv에서 눈을떼지 못한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이 어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지켜보며, 생때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가는것을 바라만보며, 무너지는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내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고 했던 그 하루가 너무나 생생해 잊혀지지 않습니다.다른 날엔 무얼했나 기억나지 않아도 그날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날의 제 감정까지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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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근직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업무상 컴퓨터에 앉아 있는게 힘들었었죠그런데중간중간 걱정이 되어 검색했던 뉴스, 그던 화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방송으로 그 장면을 보아야했던 순간....너무나 죄송합니다. 2년이 넘도록 아니 4개월만 있으면만 3년주년인데..실종자는 아직도 있고 더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아직도 세월호는 아직 그곳에 있다니..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닌가..하구요최근 뉴스를 보다가 "아직 있다"는 곡을 알게 되었죠.. 만2주년이 되어 초등학생들이그린 그림도 보았구요..삶에 바빠서 뉴스 보는 시간도 아끼고 살았던 시간..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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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두 아이 육아하면서 워낙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다보니 생긴 건망증... 목말라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도 왜 냉장고 문을 열었는지도 그 짧은 새에 잊어버리고 다시 냉장고를 닫아버릴 만큼 정신없어진 나도 그날 4월 16일에 뭘 했는지 똑똑히 기억합니다. 정신없이 아이들 아침밥 먹이고 유치원 보내고 나서 습관적으로 오전 뉴스를 틀었는데 거기 세월호가 침몰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어요. 수백명의 아이들과 민간인이 탑승한 배가 침몰 중이라는 뉴스에 크게 놀랐지만, 머지않아 큰 글씨로 "전원구조"라는 뉴스 타이틀이 뜨기에 안도했던 기억이 선명하구요. 그날 밤 탈출 생존자보다 실종자 명단이 더 많이 나와 의아해하면서도 몹시 충격이었던 기억도 또렷합니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여도, 4월 16일 만큼은 그날의 해가 질때까지 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과, 뉴스로 보고 들었던 장면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을 만큼 선명히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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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께복수는 반드시 할께박근혜를 비롯한 7시간 부역자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진실을 밝히고 죄를 물을께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악마같은 존재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최선을 다할께 사랑하다 미안하다 부디 편히 잠들길 바란다 다음 세상은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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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며 세월호가 조금씩 기울어진것을 들었습니다.제가 뉴스를 접했을때 는 정말 배가 많이 기울지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이 모두 구조될것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하지만 그 당연함에 비웃기라도하듯 구조를 하지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고 찍는 모습을 보며 의구심이 들었고 답답함도 느껴지더라구요.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하지않도록 대한민국의 수장을 뽑을때 어른들만만듣고 무조건 1번만 찍으면 침몰할 수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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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월호라는 단어가 들리면가슴 깊은곳에서 아픔이 올라옵니다.그 안에서 아이들이 고통속에서 있었을 시간을 잊을수 없습니다.누군가 감추고 싶었던 7시간을 우리는 잊을수 없는 시간입니다.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이 오보가 아니길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가...제발 그 안에서 살아있길 얼마나 기도했던가....너무 미안해서 광화문으로 ...안산으로.... 팽목항으로 잊을수 없습니다. 무슨 잘못이 그리 많길래 7시간의 행적을 관련 당사자들은 기억하기 싫어할까요?하지만 우리들은 7시간의 진실을 알고 싶기에 결코 잊을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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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고 있었습니다.티비는 객장 오른쪽 끝에 있었고 오전이라 은행에는 손님이 적어 한산했습니다배가 침몰했다니,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는데곧이어 "모두 구조"라 해서침몰 알리자마자 구조소식,뭐야ㅡ 이상했지만 어쨌거나 다행이구나손님처리를 계속했습니다.얼마지나지 않아 오보였다고 보도되고몇시간이 지나도록 배곁에는 망망대해ㅡ침몰하는것을 구경시켜주는것 같은 티비에 설마 설마하며 기다리는 손님들의 일을 계속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멍하게 집에와 저녁뉴스를 계속 보다가 이제 그만 자려고 방에 불을 껐는데, 순간 깜깜해진 방,바닷물 속에 지금 혹시 살아있는 아이들은 이보다 더 깜깜한 어둠에서,차가운 물안에서 간신히 호흡하고 무언가를 잡고 있겠구나 생각에 그제서야 눈물이 터지고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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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주부로서 여느때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전에 세월호 소식을 처음 들었을땐 늘 뉴스에서 보고듣던 그런 사고라 생각했습니다.한시간 두시간 지나며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점점 침몰해 가는 배를 마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황망함에 눈물이 어른 거림니다.저녁 그리고 밤늦도록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돋동 굴렀습니다.어.서.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데................숨이 막혀와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왜 7시간 뿐이겠습니까그다음날도 그다음날도 기억합니다.단순사고가 아닙니다.구할 수 있었던 아이들이 희생 되었습니다.진실은 침몰하지 않음을 믿습니다.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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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사무실. 어느 순간 동료가 제주도로 가던 배가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원 구조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는 수학여행을 갔던 아이들이 승객의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수학여행이 되겠다며. 그나마 밤새 친구들과 배에서의 추억을 쌓아 다행이라고. 한가롭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 사고의 진실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소식에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각자의 컴퓨터를 바라보며 하루종일 포털 메인을 새로고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일을 하나도 하지 못 하고 퇴근했습니다. 혹시 구하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 있을까. 그 하루는 피가 얼어붙고 가슴이 미어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퇴근 후 거의 밤을 새다시피 뉴스를 보며 멍해진 정신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밤새 배는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습니다. 그 밤은 그렇게 지금껏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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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나는 2016년 4월16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 서일주버스에 몸을 실었어요.전날 나는 지인의 빈소에 들러 조문을 드리고,,몇시간의 휴가를 얻어 제주에서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터였다.나에게 주어진 제주에서의 7~8시간 올레길을 걷고자 마음먹고, 모슬포항근처를 목적지로 ᆢᆢᆢ올레길 출발지점을 찾지못해 한참을 헤매다 스마트폰에서 세월호사고 소식을 접한다.비현실적인 그 망망대해의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사진한장ᆢ전원구조라는 뉴스 이후 마음을 쓰지않고 길을 걸었다..저녁을 먹기위해 찾은 식당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너무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그 비상식적인 정부의 대처, 골든타임을 그저 허망하게 보내고 수많은 귀한 생명을 떠나보낸 안타까움은 시작에 불과했다..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수학여행지,사고가 없었더라면 같은 시공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ᆢ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너무 아픈 단어일 제주,그날 잃어버린 그 7시간 난 제주에 있었다.그래서 더 죄스럽다. 이 시대를 함께 산 우리에게 세월호는 공동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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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자마자 무지 바쁘게 재료를 씻고 썰어놓느라 정신없던 1시간여가 지나고 잠시 쉬면서 있을때였습니다. 기사분이 속보가 터졌다고 하셨습니다. 수학여행간 아이들이 배안에 갇혔는데 뒤집혀있다고...온종일 그 뉴스에 붙들려있었죠. 빙빙돌기만하는 해군함정과 민간배들을 보며 방안이 있을거라고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두명도 아니고 삼백여명의 생명이 바다밑에 가라앉는 모습을 TV로 보고만 있어야했다는게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 멀리 지중해가 아닌 바로 우리 앞바다, 코앞에서 말입니다. 강에 아이가 한 명 빠져도 살리기위해 뒤도 안보고 뛰어드는게 인지상정인데, 민간잠수사들이 들어가는 걸 금지했다는 보도부터해서 비상식적인 재난대처를 하는 대한민국정부를 보면서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해마다터지는 안전사고에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내내 학교밖에서 실시하는 외부체험학습을 하지 못하고 졸업했습니다. 박근혜정부시절내내말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날, 그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찌 기억하지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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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여느 날과 같은 보통의 하루를 보냈다. 그날따라 자습하기가 너무 싫어서 그냥 일찍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수학여행가던 배가 가라앉았다는 뉴스를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당연히 다 구조될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와서 한참을 놀다가 해가 다 지고서야 TV를 틀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왜 실종자 수가 여전히 세 자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랑 둘이 뉴스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울면서 껐다. 엄마는 그 배에 있을 애들이 나랑 동갑이라서, 자꾸 내가 겹쳐보여서, 너무 슬프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뒤로도 한참을 뉴스만 보면 울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뉴스를 보며 울던 열 여덟의 나는 곧 스물 한 살이 된다. 대학생이 되어 걷게 된 4월의 캠퍼스는 너무나 예뻤고, 그래서 먼저 간 그 친구들의 삶이 사무치게 안타까웠다. 그 날, 모두가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했다면, 그 친구들도 나처럼 고3을, 스물을, 스물 하나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백명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삶을 빼앗겼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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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것이 안타깝지만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세월호 때문에 제주도 수학여행이 취소되서 원망하는 마음만 있었다 지금이라도 차가운 바닷속에 남겨진 언니 오빠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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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라디오 dj 입니다. 그 날, 전원구조 오보를 제 목소리로 방송을 통해 전했습니다.속보로 뜬 그 이야기를 빠르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보라는 것을 알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속으로 눈물만 흘렀습니다. 방송에서 제가 울 수는 없으니까요.그 날 방송국의 풍경, 조그마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다들 침묵하며 뉴스만 보던...집으로 돌아오는 도로는 지나치게 평화로워 이질적이었습니다.집으로 돌아와 아무 것도 먹지 못 하고 하루종일 뉴스만 봤습니다.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내 고향 제주도로 가던 아이들, 안산에서 자라던 내 사촌동생의 친구 동생들이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서 혼자 울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며칠 후 모든 방송을 그만두고 집밖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했죠.6개월을 그렇게 쉬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지금도 마이크 앞에서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정말 조심스럽습니다.최근까지 제대로 방송에 복귀하지 못하다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이제 겨우 본업을 정상적으로 시작하려 합니다.우리 시민들은 그 날이 이렇게 또렷한데, 아직도 그 날의 아픔이 생생한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위선자들은 대체 무엇인가요? 왜 그리 자기 자신을 속이나요.진실과 정의가 승리할 겁니다. 아주 작은 발걸음을 저는 그렇게 내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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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십수 년 전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중,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원강사입니다. 그 날 저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 휴대전화로 구조자, 실종자, 사망자의 수를 수시로 확인하며 서로에게 "괜찮아, 잘 될 거야."라며 일말의 희망을 심어줬더랬습니다. 그리고 사망자 명단에 제가 아는 이름이 없어 잠시나마 안도했고, 그런 제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여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한 달여 정도 수업 때마다 그 어린 나이에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로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아니,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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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유학중이었습니다. 우연히 TV를 틀었다 나온 소식에 놀라.. 학교도 못가고, 구조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며 계속 멍하니.. TV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백명의 아이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그렇게 가슴아팠던 날인데.. 하루종일 가슴졸이며, 타국에서 눈물만 흘렸던 날인데.. 어떻게 기억이 안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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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 지 않겠습니다!!!절대 잊어서도 않됩니다!!!이 땅에 다시는 우리 아이들을 차갑고 어두운 세상에 내몰아서도 않됩니다!!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않됩니다!!2014년 4월 16일!!!자기가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도 모른체 어두컴컴한 바닷속에 잠긴 이들에게 우리가 해줄수 있는건 잊 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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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때 초등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 1교시를 마치고 잠시 휴대 폰을 보는데 진도앞바다에 배가 빠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진으로 본 기사에는 구조헬기와 구조선이 모두 출동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구조인력과 곧 구조가 완료될거라는 내용. 그리고 당연히 구조할 수 있겠지 하는 믿음 혹은 구조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습니다.상상도 못했지요. . 4교시를 마치고 점심에 식당에 갔는데 모두 구조되었다고 하더군요. 역시나 하며 안도하고 건강하게 몸을 추스리길 바랐습니다. 오후경에 일을 모두 마치고 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비명처럼 연신 어떡해 하는 소리를 지르시길래 무슨내용인가 여쭈었더니 오보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그때서야 휴대폰으로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모두 오보였고 아직 인원파악도 못하고 300여명이 구조되지 못한채 배가 모두 기울어 있었습니다..눈물이 나고 그 시간에 나는 밥을 먹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일상을 살고 있었구나 하는 죄책감과 분통함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바로 사무실로 들어와서 울분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일말의 기대감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역의 사람들과 긴급히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을 하였고 17일에 많은 분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18일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촛불문화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 하루 sns로 알렸는데 100명이 넘는 주민이 함께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정부와 박근혜 퇴진 대한민국에 분노하는 가장 밑바닥은 바로 죄책감일 것입니다. 그 시간에 밥을먹고 삶을 살고 있었던것. 이런 무능한 정부를 잠시라도 믿었던 것.함께한다고 해도 항상 힘이 없었던 우리.. 항상 지기만 했던 우리.. 유가족이 싸워야 하는 이 나라...이번에는 모두 되살리겠습니다. 얼마가 걸려도 몇년을 거슬러올라가도 뿌리까지 뽑아 다시는 이런 눈물, 이런 국가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죄스럽고 한탄스러운 국민이 되지 않도록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너무너무 죄송하고 눈물겹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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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채.....집을 나설때는 전원구조라는 선명하고 큰 끌씨가 텔레비젼 화면을 메우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안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육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채열심히 강의하고 있었습니다.....강의를 마치고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이럴수가"가 백번도 넘게 저절로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눈물과 함께요소름과 공포의 전율이 온몸에 퍼져나가 움직일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