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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영화 시간에 늦어서 안산에서 택시를 탔다.라디오에서는 세월호 얘기가 나왔고남자친구와 세월호 얘기를 하자 택시기사님이 전원 구조됐다 하셨다. 즐겁게 놀러 간 수학여행에서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도 전원 구조 돼서 다행이라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기사로 접한 건 전원구조 오보 소식이었다.18살,내 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많은 사람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 있다. 그날 내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남자친구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가족들과 어떤 얘기를 했는지기억나지 않는다.하지만 이 날의 세월호 기억은 생생하다.앞으로 더 밝았을 생명들의 빛이 꺼졌다.꺼뜨렸다.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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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대학교 조별 발표가 있어 정신이 없었던 와중에 친구에게서 카톡을 받았다.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배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놀란 마음으로 뉴스를 검색해보니, 사고가 났지만 모두 무사히 구조 되었다고 하였다. 구조 되었다니 다행이네 라며 간단히 생각한 뒤, 수업을 듣고 발표를 진행하였다.발표를 마친 후 쉬는 시간에 교수님이 사고 이야기를 꺼냈다. 사고가 난 건 안타깝지만 사상자없이 모두 구조되었대요 라고 이야기하면서, 다시 뉴스를 클릭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침몰하고 있던 배의 사진이었다.모두 구조되었다는 것은 오보라며 아직 세월호 안에 몇 백 명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세월호는 아직 눈 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절망하면서 눈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은 점점 지나갔다. 세월호는 서서히 침몰하며 며칠에 걸쳐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없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세월호를 이야기 할 거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는 부패한 권력이 낳은 인재이다. 당연히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 모든 희생자들이 평화와 안식을 얻기를 기도하며, 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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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때와 다름없이 일을 하다가 인터넷 뉴스로 보게 된 세월호 사고 소식. 전원 구조 되었다는 소식에 별 일 아니겠거니 하고 넘겼다. 오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해경이 도착했으니 별 피해없이 다 구조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땐 몰랐다. 많은 사람들에게 춥고, 아프고, 힘든 나날이 될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하루종일 스마트폰으로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내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세상은 춥고, 아프고, 힘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기억해야한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그 믿음으로, 우리는 그 날의 기억을 잊지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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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다름없이 무관심하게 지나가려고 했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이 캄캄한 바다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나는 도저히 그 기분을 상상조차할 스 없습니다.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출근길 직장인에게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서, 등산하러 지하철 타시는 등산객들에게서 세월호를 봅니다.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잊지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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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세월호 소식을 접했고 교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안심하고 이게 웬 일이야 하며 얘기하며 바빴는데,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그 티비 화면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아이들, 내 나이대의 친구들,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할 것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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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공부중인 학생입니다. 매일이 같은 고시생은 어제도 기억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 날만은 아닙니다. 눈을 감으면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같이 점심 먹던 친구의 모습, 학교 식당에서 내가 앉았던 자리, 가라앉는 세월호가 비춰지고 있는 식당 내 티비... 오전에 공부하는 동안엔 몰랐던 사고 사실과 그 규모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시작된 정부에 대한 불신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세월호만큼 마음의 짐도 여전합니다.그날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변명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제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기억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을겁니다. 그때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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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였는데 처음 기사가 났을때 학교 단체가 웅성웅성 했어요 담임선생님은 전원 구조가 됐다는 기사가 올라왔으니 너무 걱정하지말고 얼른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는데 그게 오보라는 기사가 나왔고 결국 그 날 점심은 넘어가지 않아 남겼었어요..같은 지역은 아니지만 바로 옆 지역의 학교여서 친구 몇몇은 단원고에 다니기도 했었어요 저녁때 그 친구들한테 연락했었는데 동아리 후배가 연락이 안된다며 울고있어서 같이 울었어요 또래기도 하고 가까운 학교에서 그런 사고가 나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저는 아직도 그때가 생생해요 잊지 않았습니다. 항상 기억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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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사에 프린트를 하러 가서 컴퓨터를 켰는데 네이버 실검에 익숙한 이름의 학교가 떠있었습니다.놀라긴했지만 별일아니겠지 .. 하며 클릭했는데 단원고 아이들이 탄 배가 침수되고있지만 전원 구조했다. 라는 기사 놀란가슴을 쓸어내리며 전원구조라니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학교와 집 거리가 멀어 버스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 집으로 와서 자연스럽게 티비를 켰습니다. 전원구조는 오보였어요. 그때부터 지옥같던 시간이 흘렀습니다. 매번 집근처에서 보던 교복 어쩌면 나와 같은버스를 타고 같은 길을 걸었을 아이들... 온나라가 비탄에 빠졌고 안산시는 죽은 도시같았습니다. 저또한 그랬고요 며칠을 뉴스를 보며 울다 잠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내일은.. 내일은.. 아직도 몇 아이들과 선생님은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나는 기억합니다 그날의 비통함을... 마음이 찢어지던 그날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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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중이었는데 점심먹으면서 들은 라디오는 다 살았다고 했어요. 정말 큰일이었는데 구조되었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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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등 학교 1학년 일본인입니다.일본에서는 사건에 대해서 잊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나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얼마나 무서운 생각을 했을까요?내가 번역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한국어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나라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입니다.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 비참함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내 마음이 여러분에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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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즐거울 일도 슬플일 없이 지루하고 똑같이 흘러가던 날이내 인생에 잊혀질 수 없고, 쉽게 다른 무언갈 할수도, 편히 잠들 수도 없었던 시간.하루종일 휴대폰과 TV를 보면서이 모든게 꿈이길 간절하게 바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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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라고 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얼마 후, 정정보도가 나왔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혀있다고 했다. 나는 끝까지 해경이 구해낼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날이 크게 춥구나 밤이 아니었기에 물 속에 있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런데, 그 뒤로 왜 구하지 못한 실종자, 사망자들의 수는 줄지 않는 것일까... 왜지...시간을 계속 흘러갔다. 해가 저물었고, 나는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너무나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 이쁜 동생들이. 왜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가야 했는지. 왜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들을 이렇게 떠나보내야만 했는지. 도대체 이렇게 만든 놈들은 누구인지. 화가 나서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꾸 욕이 새어나왔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암울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제대로된 사과나 위로의 말을 들은 적도 없다.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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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정말 평범한 날이었다. 평소처럼 일어나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던 평범한 날. 조금 특별했던건 오전 중에 수 백명이 탄 선박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옆 자리에서 같이 일하는 언니가 처음 기사를 보여줬을 땐 헤드라인에 전원구조라고 정확히 박혀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다행이다라는 말을 감히 내뱉었었다. 그런데 유난히 복통이 심해 일찍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 뉴스엔 반쯤 물에 잠긴 선박의 모습이 실려있었다. 10명만 생존하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종된 채 말이다. 아마 그 분들에게도 그 날 아침은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흐린 날씨였고, 그냥 평범한 선박이었다. 그리고 조금 특별했던 건 배가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일테다. 우린 다 기억한다. 그 당황스럽고, 슬프고, 화가 나고, 마음이 미어터지던 날의 사건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아침, 평범한 업무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 아니면 어쩌면 계획된 아침, 계획된 업무 시간이었을 수도. 어찌 됐던 당신뿐만 아닌 우리는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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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02버스에서 친구에 말에 처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 어떡해.. 배가 가라앉았대"이 한마디만 듣고는 그냥 바다가 거칠어서 어선 하나가 난파됐나보다.. 인명피해는 없어야 할텐데... 이런 단순한 생각을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핸드폰을 보니 거대한 배였고 여객선이었고 아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수학여행이고......그랬습니다 ....하루종일 맘이 무겁다가 집에 가서 혼자 티비를 켜 뉴스를 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뉴스를 보며 그렇게 펑펑 소리내 울어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며칠간 계속 그랬죠.여론 조작에 괜히 거부감을 갖고 이 비극에 좀 더 가까이 공감하고 동참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내가 바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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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고3의 새학기를 어설프게 적응해나가던 날이었다.여느 때처럼 쉬는 종이 울리고 평소와 다르게 부산했던 교실부터 복도, 학교 전체.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컴퓨터를 선생님 몰래 서랍에 숨겨 놓은 핸드폰 속에서 믿고 싶지 않은 이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소리 사이에 한 친구가 "전원구조래!" 외치는 소리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종이 울렸을 때였던 것 같다.고3만 가득한 신관 건물은 아까보다 더욱 부산해졌다. 일이 터져버렸다. 오보라니. 믿지 않았다. 다들 서로 기다려보자는 말만 던진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이 건물 고3, 우리들은 1년 전 제주도 수학여행을 위해 세월호 쌍둥이배를 타고 뱃길에 올랐었다.그저 무사히 도착해서 긴 뱃길 때문에 피곤하지만 잊지 못 할 수학여행을 만들고 오라고 간절히 빌었다 이 교실의 우리들처럼.우리의 기다림은 너무 길었다.우린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같은 학생이라는 것, 비슷한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향했다는 것처럼 비슷한 점이 발견 될 때면 더 많은 눈물을 삼키며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집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며 그리고 지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내 그 눈물은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찼다. 인간이 저리도 무능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가. 목숨 앞에 왜이리 많은 이들이 의견과 주장을 내세우기 바쁜지.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매일 밤 울며 다짐하며 고3을 지새웠다.그런 나는 이제 스물하나 , 어른이 되었다.그렇지만 세상은 여전히 똑같고 나는 그 속에서 그토록 증오하던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우린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지 못할 것이다. 4월 16일 그리고 세월호를.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외면치도 포기해서도 안된다. 진실을 외면치 않고 포기하지 않을 때나는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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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거주중일때 뉴스를 접해습니다.. 구조될거라 믿었는데 ...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나고 묻혀있던 진실이 하나씩 나올때마다 목이 메입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저도 가슴이 아파 그때의 동영상을 차마 못볼때도 많습니다. 많은 분들의 마음이 보여 부디 하늘나라에서라도 아이들이 편히 쉬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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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뉴스를 처음 접하고 잘 구조하겠지 싶었습니다. 대부분 구조했다는 뉴스도 곧 있어서 별 신경 쓰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퇴근 길에 어린 학생들이 아직 배 안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 듣고 너무 기가 막혀 울음이 터져 흐느낀 그 저녁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2015년 새해 맞이하던 날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떠올리며 다시는 옛날처럼 순수한 기쁨은 누릴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에 대한 구조를 하지 않았던 이 정부와 박근혜라는 저 인간에 대한 분노가 들끓습니다. 관련자들 하나하나 고통 속에 몸부리치기를 빌고 저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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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7시 막 넘어서 아이들 아침밥을 준비하며 tv뉴스를 보고 있었다.뉴스 하단에 자막으로 "진도 앞바다 제주행 여객선 표류"라는 자막이 뜨길래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는근처 다른배로 구조됐을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날은 매주 하루 지역의 작은도서관에 사서로 자원봉사 하러가는 날이라 9시넘어 서둘러 집을 나섰고 가는 도중 걱정스런맘에 몇번 뉴스를 검색해 확인했다. 도서관 청소를 하고 10시에 소모임 하러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수 없어서 계속 뉴스검색을 했고 다른분들도 모두 걱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떠서 독서토론하던 분들께 그 소식을 전하며 함께 안도했다. 그러던 몇분후 첫 사망자 속보가 떴는데,친구에게 구명도끼를 벗어주고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를었다 익사한 단원고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모니터를 보며 숨죽여 울수밖에 없었다. 왜? 대체 그 아이는 구명복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허망하게 가야했을까 싶어 안타까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후 sns에 이상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300명이 넘는 승객이 나오지 못한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부분이 제주로 수학여행가던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멈춘듯했고 이게 꿈이길 수도없이 빌면서 모니터를 계속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기적처럼 배가 들려올라와 아이들이 부모품에 무사히 돌아가 안기는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그후 진도로, 안산으로, 광화문으로, 다시 마을 촛불로 다니며 진상규명을 외치고 다닌것은 어쩌면 누구도 아닌 나자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사회에 나 역시 한몫 했을거라는 자책과 미안함을 영원히 가슴에 품은채 살아갈 것이고 벌써 2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어제처럼 선명한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잊겠는가? 304분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 사회가 변화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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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서해바다 인근에서 프로젝트 진행중이었는데 고객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다가 식당에서 TV로 소식을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상식적이라면 승무원들과 해경과 구조원들이 당연히 구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목숨들이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에 수장되었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처음 전원구조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다행이다 싶었지요. 그래 사고는 있었지만 신속히 대응해 인명피해는 없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우리 정부는 없었습니다. 국민을 위한 대통령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안전과 해상을 지킨다는 해경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런 의무도 없는 어부님들과 같이 배에 타고 있던 의로운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그냥 묻고 가면 안됩니다. 끝까지 하나하나까지 찾아내어 밝혀야 합니다. 모든 국민들께 특히나 희생자 부모님들께 모든걸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지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제대로 섭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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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로 한참 출근하던 때였습니다.아침일찍부터 출근버스를 타야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피곤해하며,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저는 평소에 인터넷을 잘 안합니다. 그래서 소식에 둔한대, 주변에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점심먹고나서야 기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전원 구조기사타이틀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그게 오보였을줄이야..제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그 기사를 읽었는지 자세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기사보느라 거의 일을 못했고, 학생들의 사연을 읽다가 처음으로 회사에서 눈물을 흘려보았습니다.곧 해결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지켜만 봐서 미안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