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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고3의 새학기를 어설프게 적응해나가던 날이었다.여느 때처럼 쉬는 종이 울리고 평소와 다르게 부산했던 교실부터 복도, 학교 전체.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컴퓨터를 선생님 몰래 서랍에 숨겨 놓은 핸드폰 속에서 믿고 싶지 않은 이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소리 사이에 한 친구가 "전원구조래!" 외치는 소리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종이 울렸을 때였던 것 같다.고3만 가득한 신관 건물은 아까보다 더욱 부산해졌다. 일이 터져버렸다. 오보라니. 믿지 않았다. 다들 서로 기다려보자는 말만 던진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이 건물 고3, 우리들은 1년 전 제주도 수학여행을 위해 세월호 쌍둥이배를 타고 뱃길에 올랐었다.그저 무사히 도착해서 긴 뱃길 때문에 피곤하지만 잊지 못 할 수학여행을 만들고 오라고 간절히 빌었다 이 교실의 우리들처럼.우리의 기다림은 너무 길었다.우린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같은 학생이라는 것, 비슷한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향했다는 것처럼 비슷한 점이 발견 될 때면 더 많은 눈물을 삼키며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집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며 그리고 지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내 그 눈물은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찼다. 인간이 저리도 무능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가. 목숨 앞에 왜이리 많은 이들이 의견과 주장을 내세우기 바쁜지.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매일 밤 울며 다짐하며 고3을 지새웠다.그런 나는 이제 스물하나 , 어른이 되었다.그렇지만 세상은 여전히 똑같고 나는 그 속에서 그토록 증오하던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우린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지 못할 것이다. 4월 16일 그리고 세월호를.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외면치도 포기해서도 안된다. 진실을 외면치 않고 포기하지 않을 때나는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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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거주중일때 뉴스를 접해습니다.. 구조될거라 믿었는데 ...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나고 묻혀있던 진실이 하나씩 나올때마다 목이 메입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저도 가슴이 아파 그때의 동영상을 차마 못볼때도 많습니다. 많은 분들의 마음이 보여 부디 하늘나라에서라도 아이들이 편히 쉬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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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뉴스를 처음 접하고 잘 구조하겠지 싶었습니다. 대부분 구조했다는 뉴스도 곧 있어서 별 신경 쓰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퇴근 길에 어린 학생들이 아직 배 안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 듣고 너무 기가 막혀 울음이 터져 흐느낀 그 저녁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2015년 새해 맞이하던 날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떠올리며 다시는 옛날처럼 순수한 기쁨은 누릴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에 대한 구조를 하지 않았던 이 정부와 박근혜라는 저 인간에 대한 분노가 들끓습니다. 관련자들 하나하나 고통 속에 몸부리치기를 빌고 저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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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7시 막 넘어서 아이들 아침밥을 준비하며 tv뉴스를 보고 있었다.뉴스 하단에 자막으로 "진도 앞바다 제주행 여객선 표류"라는 자막이 뜨길래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는근처 다른배로 구조됐을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날은 매주 하루 지역의 작은도서관에 사서로 자원봉사 하러가는 날이라 9시넘어 서둘러 집을 나섰고 가는 도중 걱정스런맘에 몇번 뉴스를 검색해 확인했다. 도서관 청소를 하고 10시에 소모임 하러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수 없어서 계속 뉴스검색을 했고 다른분들도 모두 걱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떠서 독서토론하던 분들께 그 소식을 전하며 함께 안도했다. 그러던 몇분후 첫 사망자 속보가 떴는데,친구에게 구명도끼를 벗어주고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를었다 익사한 단원고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모니터를 보며 숨죽여 울수밖에 없었다. 왜? 대체 그 아이는 구명복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허망하게 가야했을까 싶어 안타까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후 sns에 이상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300명이 넘는 승객이 나오지 못한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부분이 제주로 수학여행가던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멈춘듯했고 이게 꿈이길 수도없이 빌면서 모니터를 계속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기적처럼 배가 들려올라와 아이들이 부모품에 무사히 돌아가 안기는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그후 진도로, 안산으로, 광화문으로, 다시 마을 촛불로 다니며 진상규명을 외치고 다닌것은 어쩌면 누구도 아닌 나자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사회에 나 역시 한몫 했을거라는 자책과 미안함을 영원히 가슴에 품은채 살아갈 것이고 벌써 2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어제처럼 선명한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잊겠는가? 304분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 사회가 변화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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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서해바다 인근에서 프로젝트 진행중이었는데 고객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다가 식당에서 TV로 소식을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상식적이라면 승무원들과 해경과 구조원들이 당연히 구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목숨들이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에 수장되었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처음 전원구조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다행이다 싶었지요. 그래 사고는 있었지만 신속히 대응해 인명피해는 없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우리 정부는 없었습니다. 국민을 위한 대통령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안전과 해상을 지킨다는 해경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런 의무도 없는 어부님들과 같이 배에 타고 있던 의로운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그냥 묻고 가면 안됩니다. 끝까지 하나하나까지 찾아내어 밝혀야 합니다. 모든 국민들께 특히나 희생자 부모님들께 모든걸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지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제대로 섭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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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로 한참 출근하던 때였습니다.아침일찍부터 출근버스를 타야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피곤해하며,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저는 평소에 인터넷을 잘 안합니다. 그래서 소식에 둔한대, 주변에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점심먹고나서야 기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전원 구조기사타이틀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그게 오보였을줄이야..제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그 기사를 읽었는지 자세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기사보느라 거의 일을 못했고, 학생들의 사연을 읽다가 처음으로 회사에서 눈물을 흘려보았습니다.곧 해결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지켜만 봐서 미안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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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에 모팀장님과 뉴스를 통해 아이들이 다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소통이 잘 못되어 온나라의 비극을 안겨준 그날을 잊지 못할듯.. 꽃도 못피워보고 간 학생들에게 미안할뿐입니다.이젠 국민이 나서서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정부를 감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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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세월호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해결되고 증명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TV를 보다가도 비슷한 장면이나 어머니 또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 또는 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세월호 부모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료해주는 이는 누구여야 하나요. 국가는 왜 이 엄청난 일을 3년이 다 되도록 궁금증 하나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는 걸까요. 대통령의 7시간은 당신 자신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의 7시간이며, 모두의 의문이며, 모두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철저한 진실규명만이 그간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는 남겨진 세월호 부모님 편에 설 것입니다. 매일매일 약속합니다. 노란 리본 앞에서 맹세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위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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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년생이었습니다언제나 그랬듯 뉴스속 이야기는 남의일만 같았고 모든것은 일상으로 되돌아가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서촌 어귀에서 점심식사를 했던 것 같아요. 그 날의 7시간은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인턴이긴 했지만 마치 나도 그 사회속 일원인 것 마냥 지나간 시간이었어요.하지만 나도 정직원이 되지 못했고, 아이들도 돌아오지 못했어요.아이들을 밝혀주는 촛불만이 아직 광화문에 남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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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어느 덧 3주년에 다가오기까지 반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시크릿 7시간으로 인하여 304명의 소중한 목숨들이 떠났습니다.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며 슬슬 겨나오는데 분노한 민심을 외면한 댓가를 치르게 할겁니다. 대통령의 7시간을 밝히지 않는 한 박근혜 게이트도 끝나지 않을 것이며 세월호 희생자들도 맘편히 하늘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Remember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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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넘어가서 물기둥을 뿜어내는 상황을 TV를 통해 다들 보고 있었다.처음에는 전원 구조라는 방송그러나 수백명의 실종자 숫자 가 화면 상단에 계속 나타나는 모습온 국민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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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의 밤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집에 왔습니다. 아침부터 자면 밤에 잠을 잘 수 없어서 텔레비젼을 보면서 안 자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깜 짝 놀랐지만, 전원 구조했다는 속보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뉴스를 다시 보니 구조를 못 했다는. . 배는 다 잠기고... 얼마나 미안했는지..너무 죄스러웠습니다. 절대 잊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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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에서 거주하는 유학생입니다.아마 제 기억으로는,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지는 못했을거에요, 짧게 짧게 뉴스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었거든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지만, 한번 펑펑 울고 울고 나서 어쩔수 없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그냥 넘어 갔던것 같습니다. 용서해주세요.평생 잊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지난 2년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던 저의 모습을 되돌아보니 부끄럽습니다. 죄송해요. 앞으로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꼭 그 7시간의 진실을 밝혀지길 간절히 기도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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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상이 흘렀는데도 지금도 그때를 생각을 하면 너무나 안타까움에 눈물이 얼마동안은 얼마나 울고 지냈는지 ~~ 우리 아이들 그 암흑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살아 돌아가길 빌고빌었을까 생각하면 ㅠㅠ 그런데 이런 아이들의 희생을 가벼히 생각하는 대통령이 있으니 자기 사욕만 챙기는 현실이 참 할말없게 만듭니다. 많은 국민들이 주권을 주장하고 한사람한사람의 쓴소리도 가벼히 여기지않고 소중히 생각해주는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국민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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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학교에 있었는데... 학교 도착하고 보니 주변 친구들이 배가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건인가 하는 생각에 휴대폰으로 잠깐 뉴스를 봤는데, 불과 몇년밖에는 나이차이도 나지 않는 고등 선배들이 배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전원 구조라는 말에 안심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뉴스를 보니 어이 없게도 틀 때마다 구출자 수가 계속 바뀌는 등 이상한 보도가 나왔다. 결국 배가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선배들이 차디 찬 물속에서 생을 마친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아니라, 같은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하며 살다가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간 그분들에 대해 너무나 죄송하다. 부디 하늘에서는 마음 편히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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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엄마도 그 날 수학여행을 가셨어요. 저희 엄마는 진도에서 선생님을 하고 계시고 저는 그 당시 수업중이었는데, 수업도중에 선생님이 진도에서 수학여행 가던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딱 전해 듣자마자 우리 엄마가 떠올랐어요. 저희 엄마도 똑같은 날 진도에서 학생들 데리고 배타고 수학여행 가셨거든요. 안산에서 출항한 배였다는걸 못들은 상태였어요. 처음에 1~2분동안은 머릿속으로 정말 많은 생각이 지나갔는데, 설마 우리 엄마일까.. 오늘 아침에 별로 좋은 말 하고 나오지도 않았는데 설마 이게 마지막이 되진 않겠지.. 등등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했던 모진말들이 다 생각나면서 수업시간 도중에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이게 마지막이라면 정말 후회도 많고 엄마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것 같단 생각이들고 정말 별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저 혼자 수업을 중단하고 선생님하고 엄마한테 전화해보기로 했는데 엄마랑 전화연결도 안되고 그랬어요. 절망적이였죠. 그리고 안산에서 출발한 배란 소식을 듣고 그 다음엔 전원구조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예요. 있어서는 안될 역대급 오보. 그리고 끊이지 않는 언론의 거짓말들까지...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정말 뚜렷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한테 어디서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저희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세월호 생각밖에 없었던 것, 집에와서 이젠 믿지못할 언론사 채널을 켜놓고 가슴졸이며 같이 울던것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절대 잊지 않을것 입니다. 잊지 못할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어떻게 이런 일을 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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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며 아무생각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tv보다가 하늘보다가 tv보다가 하늘보다가 하면서 일도 못하고 흐르는 눈물만 하염없이 닦아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직도 그때 생각을하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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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된 첫째 아이와 함께 새집으로 이사온 다음날이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새집에서, 남편이 출근한 뒤에 조용한 시간을 아이와 둘이 보내며 뉴스를 보고 있는데 세월호 보도가 나더군요. "전원 구조"라기에 "별일이네, 다행이다.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겠구나"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게 생중계 되고 있는데, 전원구조는 오보였고, 그 날 이후로 믿을 수 없는 뉴스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지요. 아이러니하고 구슬프게도, 그 날을 생각하면 전 깔끔하게 정리된 집과 그 집안으로 들어오던 따스한 기운. 그리고 해맑게 놀고 있던 제 첫째 아이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기억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기억이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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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월호 사고에 대해 굉장히 늦게 안 편입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여느날과 다름없이 학교가 일찍 끝난 후 돌아와 집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후 티비를 틀었더니 뉴스가 나오더군요. 커다란 배가 바다에 잠겨가는 모습이요. 처음엔 사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큰 사고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볼 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이 사고가 얼마나 끔찍하고 안타까운 사고인지가 실감났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채 피지 못한 수 많은 꽃들이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 앉았습니다. 꽃잎은 흩어졌지만 그 씨앗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심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질때까지 우리의 촛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진실은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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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병원 수술실 앞에서 친정엄마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기하는동안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TV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죠. 다행히 모두 구조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오후 뉴스에 다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로도 며칠동안 밤을 새가며 구조소식을 기다리며 TV앞을 떠나지 못했죠.결국 더이상의 구조자가 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고 안타까운 마음에 한동안 공황상태처럼 지냈어요.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제가 그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다시한번 고인들의 명곡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