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근하고 속보 기사를 봤습니다. 처음엔 "큰 일 아니겠지 금방 구조될거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전원구조 기사를 보고 "그럼 그렇지" 안도했습니다. 그런데...지금 우리는 이렇게 슬퍼하고 있네요. 국가를 너무 믿었던 것일까요?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7초도 아닌 7분도 아닌 7시간. 이 시간동안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안타까운 마음에 하루종일 울었고, 그 후로도 오랜 기간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
그날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승객들은 모두 구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기울어가는 배와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구조작업을 화면으로 접하며 들었던 "왜", "어째서"라는 의문과 분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 내가 가졌던 왜와 어째서에 대해 답을 듣고싶다.
-
포털사이트 에서 배가 잠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걱정이 되지 않더라고요. 한국이 얼마나 빠르고 민첩한데... 전 정부기관이 제 할일을 할거라고 믿었습니다. 몇시간후 다음날 아침 저는 아무도 구조되지 못한것을 알고 눈물만 뚝뚝 흘릴수밖에 없었습니다 . 국가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책감 그리고 미안함 . 저는 그날을 그리고 그 이후를 기억합니다. 국민은 어디에 살고있든 절대로 그날을 잊지않습니다.
-
세월호가 출항할 때 다음날의 학원을 위해 숙제를 하고 있었고 세월호 안에서 단원고 학생들이 레크레이션을 즐길때 꾸벅꾸벅 졸며 책상에 엎드려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세월호가 이상한 낌새를 보일때 학교갈 준비를 하며 친구와 어디서 만날지 전화하고 있었고세월호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할 때 두번째 줄 세번째 분단의 의자에 앉아 수학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세월호가 무너져 내리고세월호에 탄 모든 사람들의 생명빛이 하나둘 꺼지고그런 세월호를 지켜보기만 하는 대통령이 해야하는 명령은 안 내리고 그저 여러사람과 악수만 나누고 있을때저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습니다.많은 학생들의 빛나는 졸업사진이 검은 테두리의 액자 안에 들었는 사진으로 대체되고아기가 아기를 위해 희생하고수백명 수천명의 가족의 미래가 처참히 짖밟히게 되어버린 이 사건이 막을 수 있었을 때저는 평소처럼 행동했습니다.그저 평소처럼, 아무 일 없듯이
-
그날은 엄마가 맹장수술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같이 뉴스를 보는데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분명 뉴스에서 전원구조를 봤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진짜 다행이라고 그러고 있었는데 구조자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청와대는 보고했다고만 하고 대통령이란 사람은 보이지않고....
-
공군기를 타고 공중에서 조명탄을 수만발 터트리는 작업에 참여했었습니다. 당시 군인이었기에 사건이 터진 당일,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몰랐고 후에 TV 속보들을 보고 이 사건을 알게됬죠무척 힘들게, 그리고 간절하게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종자를 끝내 찾지 못하고 일단락되어서 정말 안타깝고 그때의 기억이 정말 제 삶에서 커다란 경험이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이 세월호사건과 제가 밀접했던만큼 그 긴박했던 구조의 순간에, 국민들이 애타는 그 시간에 대통령은 진짜 뭐 했냐는 분노가 정말 큽니다. 대통령의 7시간은 정말 꼭 밝혀내야 합니다
-
2014년. 집에 돌아 오는 길의 버스.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내가 탔던 배가 뉴스에 나왔다. 아마도 안타까움은 그 상황이 나와 잠깐이나마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인지 더욱 다가와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핸드폰을 끌어내리면서 소식들을 봤다. 얼마나 무서울까. 나는 지금 버스가 덜컹 거리는 순간에도 퍼드득 거리는데. 그리고 바로 올라온 속보에는 모두 안전하게 구출 되었다고 했다. 좋은 기억만 있어야 하는 수학여행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모두 집에가서 따뜻하게 이불 두르고 있었으면. 하고 안심했다.날조된 안심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 그 후로..
-
당일날에 인터넷접속도, 티비도 틀지않고 있다가 다음날에서야 문명을 접해 알게 된 사고...처음에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나더군요. 날씨가 추워지면 더 생각나곤 합니다. 물에서 얼마나 추웠을지...
-
복지센터에서 오신 장애인분들 진료를 보고 있었습니다.정확히는 사고났다는거 보고 그분들이 오셔서 중간중간 기사를 확인하며 복지관 선생님과도 얘기 나눴어요.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보고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진료에 집중했고 진료가 끝난후 모든게 거짓인것을 알게되었어요.같은 지역의 아이들이 대다수였던 일이라 더 생생히 기억하네요. 그아이들중 제게 치료받은 아이도 지인의 동생도 친구동생의 절친도 포함이였어요.모두가 기억하는 그날을 기억못하는건 말이안됩니다
-
친구 웨딩촬영이 있어서 서울가는 버스안에 있었어요. 전원구조됐다는 속보를 보고 잠이들었는데 그게 아니였죠.그 날은 하루종일 바빠서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었고 전원구조라는 말만 믿고있었는데...잊지못하고 잊을수 없는 일이 일어났죠.말도 안되는일,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일..그게 그냥 사고가 아니라는 말이 돌면서 나라에 대한 불신이 많이 커졌던거 같아요. 제발 진상규명이라도 다 해서 떠나가신 분들과 남은 가족분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수 있었으면...다시는 이 나라 이 지구에서 이렇게 가슴아픈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평소대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같이 일하시는 선생님께서 뉴스를 보고 계셨지처음에는 전원 구조 라는 뉴스 타이틀를 읽으셨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타이틀이 거짓인걸 알았고 또래인 남동생이 생각이나면서 모든 일이 손에 안잡혔어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서 뉴스 채널을 붙잡고 거짓말이길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
학교가려고 일어나서 씼고 늘 똑같이 티비를틀어 음악방송을 보면서 준비하려고했지근데 티비를 키니까 뉴스가 나오더라배가 침몰했고 다들 구출됐대 다행이다 했지그리고 나는 음악방송을 틀고 준비를 다하고나와서 늘 그렇듯 지하철을 타면서 학교를 가고있었어 인터넷을 키니까 아까 그얘기가 또 나오더라근데 이게뭐야 갑자기 구출됐다는 사실이사실이 아니었어 그냥 벙쪄있었지
-
시험기간이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해 처음 맞는 전공 시험이라 책상에 앉아 프린트 물과 교재를 보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갑자기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는 단톡방에 메세지가 무섭게 휘몰아쳤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뉴스 틀어 속보 떴어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고 절대로 잊지 읺을 기억입니다.얘들아 오늘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어. 오늘 따라 너희가 너무 그립다.
-
23살 . 학교에서 세월호에 대해 뉴스발표를 봤다. 다시 또 다른 뉴스 전원구조 안심 하 다행이다 .수학여행이라는데 애들 놀라겠다 . 어 학생들만 탄거 아니네 그래도 구조 되셔서 다행이다 .저녁먹어야지. 어 뭐야 전원구조라매 ..점점 발표되는 희생자분들의 신상아이들의 구조소식 .. 나타나지않은 대통령 도망간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내가 기억하는 7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분노와 세월호 희생자들
-
그당시 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에 소식을 접했고, 전원 구조라는 말에 안심하고 수업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시간만에 나보다 어린 많은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 갖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구할거야. 구해내겠지. 그들을 믿었고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동생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 모두 함께 많이 아파하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구해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저,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
그 날. 그 날의 나는 산속 기숙학원에서 그 전날과 닮은 삼수 생활을 이어나가던 참이었다. 바깥 세상과 이어진 통로라고는 매일 아침 비치되는 신문밖애 없었던 그 곳에서, 4월 모의고사를 보는 우리들에게 선생님들은 말을 아꼈다. 별다를 것 없던 모의고사가 끝나고 저녁을 먹은 나는 기숙사에서 노닥거리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 큰 사고가 났는데...배에 타고 있단 사람들이 몇백명이 죽었대....우리 부모님도 그쪽으로 가고 계신가봐..목포에 살던 친구가 부모님 전화를 받고 우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남의 고통보다는 내 삶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웠던 그때의 나는, 그것이 매일같이 들려오는 교통사고 소식이라고 속단했다.수학여행을 가던 나보다 어린 아이들. 가족여행을 가던 사람들. 개중에는 7살 짜리 아이도 있었다고 했다.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참사였고, 대응만 잘했어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수업에 들어와 눈시울을 붉혔고, 나는 매일같이 신문을 읽으며 줄줄 울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세상과 차단된 그곳에서, 머릿속에 수능만을 남겨둔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렸다. 신문을 줄 서서 보고, 학원이 끝나면 모여앉아 종종 다 함께 소식을 업데이트했다. 유병언이란 사람이 있대. 해경이 폭언을 했대. 정부에 비리가 많은가봐.그리고 그 뒤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대로다. 진실은 아직 온전히 빛을 보지 못했고, 나는 여전히 세월호란 이름만 들어도 줄줄 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가족들의 신체 특징을 알려줬고, 아버지는 고등학생 애들만 봐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얘기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세월호를 기억한다.
-
당시 전남에 있는 대학교 재직생 4학년 이었던 저는 아직도 그날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그 날은 시험기간이었고 아침일찍 시험 시작 전에 도서관으로 갔습니다공부를 하다 문득 본 핸드폰에서 세월호 사고 기사를 봤습니다전원구조라길래 별 생각 없이 다시 책에 집중했습니다시험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평소와 시내 분위기가 다른걸 느꼈습니다작은 도시라 평소엔 도로도 한산하고 시내도 조용하죠하지만 그 날은 도로에 유독 차가 많았습니다특히 구급차.. 처음엔 두세대가 보이더니 나중엔 줄지어 어디론가 급하게 향하는걸 봤습니다근처에 교통사고가 났겠거니 했는데 곧바로 경찰차들도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걸 봤습니다그 뒤론 경찰 오토바이까지...뭔가 사고가 나도 크게 났구나 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처럼 티비를 틀었습니다그 때 평소와 이상했던 분위기의 이유를 알았습니다전원구조 오보.. 세월호 물에 잠겨....제가 봤던 수많은 구급차와 경찰차, 오토바이들 전부 진도로 향하던 것이었겠죠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한동안 집 앞 초등학교 담벼락과 육교 난간에 무수히 많은 노란 리본들이 사람들의 염원과 함께 달려있었어요바람에 움직이는 수많은 노란리본의 그 모습들도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매년 그 날 광화문 광장에 나가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그 분들이 이제는 그만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
학교수업을 들으러 준비하고 있었어요.거실에 켜있던 텔레비전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 구조되었다고 나와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가벼운 사고였구나..수업이 끝나고 버스에 올라 핸드폰을 보는데 전원 구조는 오보였고, 300명 넘는 사람들이 배에 갇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지금까지도 그 충격과 공포가 생생해요...
-
저는 그날 또한 매일 이용하는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있었어요. 처음 소식을 접한건 버스 안에서 승객분들께 큰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신 한 아주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자주 버스에서 마주치지만 서로를 알지 못하는 이웃분들과 저는 그 아주머니의 말씀에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고 좋은 소식이 있길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모두가 구조되었다는 문자와 그 문자가 틀렸다는 얘기 둘 다 버스 안에서 접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버스 안 승객분들 모두 각자의 신께 빌고 빌었을거에요. 어쩔수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아직도 같은 버스를 매일 이용해요. 아마 그날 함께 울었던 분들 중 대부분이 아직 그 버스를 이용하실거에요. 그리고 아마 그분들께서도 저처럼 버스에서 문득문득 그날을 떠올리실거에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그날은 정말 끔찍했고 버스에서 가만히 앉아 소식을 찾아보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던 제 자신이 싫었어요.
-
학교 앞 고시텔에서 자취할 때였다.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앞에 TV가 있는 방구조였는데, 아침과 밤에 항상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그 장면과 함께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TV를 켜서 한쪽 구석에 있는 생존자수와 사망자수를 확인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망자수와 가라앉아서 점점 보이지 않는 세월호를 보며 나는 아침마다 울음으로써 잠을 깼다.강렬할 우울함, 무기력함과 슬픔은 아직도 잊혀지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