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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에 소식을 접했고, 전원 구조라는 말에 안심하고 수업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시간만에 나보다 어린 많은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 갖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구할거야. 구해내겠지. 그들을 믿었고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동생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 모두 함께 많이 아파하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구해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저,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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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날의 나는 산속 기숙학원에서 그 전날과 닮은 삼수 생활을 이어나가던 참이었다. 바깥 세상과 이어진 통로라고는 매일 아침 비치되는 신문밖애 없었던 그 곳에서, 4월 모의고사를 보는 우리들에게 선생님들은 말을 아꼈다. 별다를 것 없던 모의고사가 끝나고 저녁을 먹은 나는 기숙사에서 노닥거리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 큰 사고가 났는데...배에 타고 있단 사람들이 몇백명이 죽었대....우리 부모님도 그쪽으로 가고 계신가봐..목포에 살던 친구가 부모님 전화를 받고 우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남의 고통보다는 내 삶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웠던 그때의 나는, 그것이 매일같이 들려오는 교통사고 소식이라고 속단했다.수학여행을 가던 나보다 어린 아이들. 가족여행을 가던 사람들. 개중에는 7살 짜리 아이도 있었다고 했다.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참사였고, 대응만 잘했어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수업에 들어와 눈시울을 붉혔고, 나는 매일같이 신문을 읽으며 줄줄 울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세상과 차단된 그곳에서, 머릿속에 수능만을 남겨둔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렸다. 신문을 줄 서서 보고, 학원이 끝나면 모여앉아 종종 다 함께 소식을 업데이트했다. 유병언이란 사람이 있대. 해경이 폭언을 했대. 정부에 비리가 많은가봐.그리고 그 뒤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대로다. 진실은 아직 온전히 빛을 보지 못했고, 나는 여전히 세월호란 이름만 들어도 줄줄 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가족들의 신체 특징을 알려줬고, 아버지는 고등학생 애들만 봐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얘기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세월호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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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남에 있는 대학교 재직생 4학년 이었던 저는 아직도 그날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그 날은 시험기간이었고 아침일찍 시험 시작 전에 도서관으로 갔습니다공부를 하다 문득 본 핸드폰에서 세월호 사고 기사를 봤습니다전원구조라길래 별 생각 없이 다시 책에 집중했습니다시험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평소와 시내 분위기가 다른걸 느꼈습니다작은 도시라 평소엔 도로도 한산하고 시내도 조용하죠하지만 그 날은 도로에 유독 차가 많았습니다특히 구급차.. 처음엔 두세대가 보이더니 나중엔 줄지어 어디론가 급하게 향하는걸 봤습니다근처에 교통사고가 났겠거니 했는데 곧바로 경찰차들도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걸 봤습니다그 뒤론 경찰 오토바이까지...뭔가 사고가 나도 크게 났구나 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처럼 티비를 틀었습니다그 때 평소와 이상했던 분위기의 이유를 알았습니다전원구조 오보.. 세월호 물에 잠겨....제가 봤던 수많은 구급차와 경찰차, 오토바이들 전부 진도로 향하던 것이었겠죠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한동안 집 앞 초등학교 담벼락과 육교 난간에 무수히 많은 노란 리본들이 사람들의 염원과 함께 달려있었어요바람에 움직이는 수많은 노란리본의 그 모습들도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매년 그 날 광화문 광장에 나가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그 분들이 이제는 그만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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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수업을 들으러 준비하고 있었어요.거실에 켜있던 텔레비전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 구조되었다고 나와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가벼운 사고였구나..수업이 끝나고 버스에 올라 핸드폰을 보는데 전원 구조는 오보였고, 300명 넘는 사람들이 배에 갇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지금까지도 그 충격과 공포가 생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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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또한 매일 이용하는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있었어요. 처음 소식을 접한건 버스 안에서 승객분들께 큰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신 한 아주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자주 버스에서 마주치지만 서로를 알지 못하는 이웃분들과 저는 그 아주머니의 말씀에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고 좋은 소식이 있길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모두가 구조되었다는 문자와 그 문자가 틀렸다는 얘기 둘 다 버스 안에서 접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버스 안 승객분들 모두 각자의 신께 빌고 빌었을거에요. 어쩔수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아직도 같은 버스를 매일 이용해요. 아마 그날 함께 울었던 분들 중 대부분이 아직 그 버스를 이용하실거에요. 그리고 아마 그분들께서도 저처럼 버스에서 문득문득 그날을 떠올리실거에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그날은 정말 끔찍했고 버스에서 가만히 앉아 소식을 찾아보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던 제 자신이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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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고시텔에서 자취할 때였다.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앞에 TV가 있는 방구조였는데, 아침과 밤에 항상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그 장면과 함께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TV를 켜서 한쪽 구석에 있는 생존자수와 사망자수를 확인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망자수와 가라앉아서 점점 보이지 않는 세월호를 보며 나는 아침마다 울음으로써 잠을 깼다.강렬할 우울함, 무기력함과 슬픔은 아직도 잊혀지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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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대학생인나는 공강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잡은 핸드폰 뉴스에는 모두 구조가 됐다고 나왔길래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을꺼 같았던 하루인데, 점점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문제가 생긴걸 알게되었고 하루종일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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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하고 급식실 갔는데 선생님들이 배가 뒤집혔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헉 큰일이네요 했는데 한 어른 선생님께서 쿨하게 전원구조했대~ 걱정하지마 하셨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함. 근데 다시 뉴스를 보니 구조를 못했다면서 실종자 숫자가 막 올라가는 것. 수업 끝나고 오면 100명씩 늘어있어서 이게 도대체 뭐야? 했음. 임용되고 3년 연속 배타고 수학여행을 갔던 나는 그 크고 안전해 보이던 배가 침몰했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음 어쩌면 내가 우리반 학생들이 타고 있었을지도 모를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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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분명 고3인 나에게 평범히 흘러가던 날이였는데 잊을 수 없는 날이 돼버렸어요.같은 나이 또래로서 그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구조되길 바랐고, 전원구조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울면서 커뮤 속에서 그 감정을 서로 나눴는데 오보였대요.오보가 나도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오보가 있고 그렇지 않은게 있는건데 그래서인지 그 날은 몇되지 않은 내 인생중에서 가장 무력했던 순간이였어요. 얼마나 무서웠을까.. 보고있는 나도 무서웠는데.. 그 날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같아요. 앞으로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고, 잊어서도 안되는 일이에요. 그곳에서는 부디 편안하고 하고싶은 것 다 해보길. 언제까지나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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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똑같은 출근길...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버스 지하철을 이용하며 스마트폰을 보며 그렇게 똑같이 지나갈듯한 그날의 아침이 지금까지도 친구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 제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날 아침이 될거라고 누가 알고 있었을까요...... "속보세월호침몰" 이라는 뉴스를 보며 당연히 구조가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속보전원구조" 라는 문구에 저는 그냥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하며 그렇게 하루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아직까지 나오지 못한 승객들이 있다는 소식에 말이 되는소리냐 라며 뉴스를 보니 이미 배는 물속으로 들어가버린 장면만 나오고 있더군요... 1주일을 뉴스를보며 친구들 부모님들의 오열하시는 모습을 보며 울면서 지냈습니다.그리고 제가 이나라의 어른이라는게 이렇게 부끄러운것 인지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친구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러웠고 지금도 그렇습니다.2016년 12월 9일 여러분들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묻혀지지 않도록 다시 시작하는 그날이 오늘이 되었습니다. 기억할것이고 기억되어질 것입니다.어른이어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 이제야 이렇게나마 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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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가결이 당연함에도 오늘 하루는 그 날처럼 내 가슴은 요동쳤다...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시각 고3인 나의 아들은 학교에 있었지만..세월호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아이들이 무사 구조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일을 하면서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나 역시 불안에 떨었었다..네이버에 여러차례 접속하고 또 접속하며 구조되는 아이들이 있는지 모든 관심이 세월호에 집중했었다.. 아마 온 국민들이 나와 같은 심정이였을 것이다..그러나 정작 이 나라 국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과연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구심 마저 들며 대통령도 아이들도 언제 나타나나 마음 조렸던 기억이 난다...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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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다른날과 다름없이 회사업무에 파묻힌 날이였습니다.일을 하던 도중 갑작스런 속보에 기사를 살펴보니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과 일반승객분들이 탄 배가 사고가 났지만 전원 구조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기사를 읽고 회사분들과 다행이다. 빨리 구조했네 등의 짧은 얘기를 마친 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을 가니 티비에선 오전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식당 사람들 모두 식사를 멈춘채 한참을 뉴스만 봤었던 것 같아요.어찌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와 기사를 다시 살펴보이 오전의 기사는 오보였고 오후의 기사가 사실이였습니다.그날의 기억은 이게 마지막입니다.무슨 정신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정신을 차리고 든 생각은정부에 대한 불신 ,아이들과 승객들에 대한 슬픔, 세월호 선장에 대한 분노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승객분들과 아이들이 얼마나 괴롭고 무서웠을지 상상조차 되지않아요. 감히 제가 상상조차 할수없어요.제가 살아가는 동안은 그 날이 잊혀지지 않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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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점심밥을 먹고 노래하며 방으로 들어오던 중 계속 카톡이 울려 폰을 확인해보니 한국에 있는제 친구가 지금 한국에서 배가 뒤집혓는데 그안에 400명이나 타고 잇다고 전해줫었습니다. 전 엄마에게 이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알리며 당연히 곧잇으면 구출되겠지뭐 라고 생각하고 있을쯤 티비를 틀어보니 답답하게 구조실행은 하지도 않으며 암마와 이게 지금뭐하는거지 안에있는 사람들이라도 빨리 구해야하는것 아니냐며 티비를시청하고 있었습니다ㅠ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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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7년생, 차가운 물 속에서 외로이 식어갔을, 무겁고 그들과 동년생이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나는 그들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우리 학교도 단원고와 같은 일정. 수학여행을 떠난 첫 날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먹고 웃으며 수학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버스에서 외쳤다. "야야 큰일났어! 지금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배 기울었다는데?" 이걸 듣고 나는 물었던 것 같다. "인명 피해는 없대?" "잠깐만." 잠시동안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속보 영상을 주시하던 아이는 "아 다행이다. 인명피해 없고 다 구조 했대!" 나를 비롯하여 주변의 친구들은 다행이다. 별 일 없어서. 아니 어쩌면 그들에겐 이미 많이 무서운 일 이었겠지만, 살아주어서 다행이다. 라고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티비를 켤 새도 없이 숙소에 모여 과자따위를 먹으며 수다를 나누던 우리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한참 수다를 떨던 중, "야 티비좀 켜봐봐. 재밌는 거 안 하나?" 한 친구의 말에 티비를 켰고 그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다. -세월호 침몰. 아직 구조 작업 중. 아직 물속에 남아있는 백 몇 명의 친구들. 사망자 발견. 벙쪘다. 아깐 괜찮다며? 다 구조 했다며? 왜 이렇게 된거지? 화가 났다. 나라는 대체 무얼 하나? 해경과 구조대는 무얼 하나? 슬펐다. 많은 생명이 저 차가움 속에서 꺼져갔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했다. 우리와 같은 설렘, 같은 마음이었을텐데. 나만 즐거워서 미안했다. 나는 그 어리고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싶다 울부짖는 일곱시간 동안 종적을 감춘 대통령을 원망했다. 아니 원망한다, 지금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 팔찌를 샀고, 집에서 가까운 분향소를 들렀고, 그 곳에서 노란 리본에 "미안해" 라고 적어 매달아 두었고, 노란 리본 뱃지를 사 가방에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일 이후 잠시 놓았던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놀다가 공부를 한 다는게 그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는 높은 사람이 되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고싶었다. 친구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입을 목표로 더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부끄럽게도 지금 대학에 진학한 스무 살. 그 때의 그 마음가짐과 분노를 잠시 잊고 살았다. 이 글은 나 자신과의 서약서와도 같을 것이다. 일년 반 동안 이년 전의 나를 축축히 불타오르게 했던 그 사건 그 공기를 다시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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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열여섯이었다.수업 중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많이 태운 배가 침몰하고 있다. 학급 일동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 보았었고 이어서 모두가 안전하게 구조 되었으니 걱정하지 마라며 또 여느 때와 같이, 다름없이, 수업을 진행했다. 나 또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었다.종례를 마치고 휴대폰을 받자마자 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에 들었던 배 침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흘렀는데 어째서 검색 순위에 오르는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에 이것저것을 찾아 보았었다. 구조되지 못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며, 사망자까지 나오고 있다니. 흉포한 소식에 눈물이 핑 돌아 곧장 텔레비전을 켰던 것 같았다. 뉴스에서도 그닥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던 소재는 없었던 것 같다.계속되는 구조 작업에도 그들은 나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허술한 구조 작업에. 다른 시민도 있었으나 단원고등학교의 학생들. 나는 내 또래의 어린 희망들이 차가운 물에 잠식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 되었다.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머무르고 있다.나보다 어려진 그들을 기리며,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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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월호 뉴스를 집한게 아침 10시 조금안되는시간 택시에서 라디오뉴스를 통해서입니다. 모두 구조했다고해서 다행이라고 별일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슴아픈 기억이 될줄은 몰랐습니다.하루종일 제발제발 하면서 기도했는데... 절대 잊지않을거고 절대 용서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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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저는 2014년 4월, 11월 나란히 입대를 했습니다. 대구에 있는 작은 할아버지, 할머니댁을 찾아뵈러 내려가는 길에 세월호 사고가 난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나왔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대구에 도착해보니 구조가 아닌 대참사가 일어났더군요. 작은 할머니와 아버지, 동생과 함께 충격에 빠졌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사고인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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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졸업 전 마지막 체육대회라며 남는건 사진밖에 없다 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사진을 닥치는대로 찍었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가록하기위해서 ...언니,오빠들도 친구들과의 즐거운 여행을 꿈꾸며 설레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겠지? 세월호 소식을 들은건 점심시간이었다. 교무실 앞 복도에 서있는 나에게 세월호 속보를 들고 뛰어오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친구는 내게 제주도로 가는 배 사고가 났다고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어떡하냐면서 세월호 탑승객들을 걱정했다. 5분 정도 흘렀을까 탑승객이 전원구조되었다는 기사를 보았고 우린 안심했다. 하지만 전원구조는 사실이 아니었고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국가는 우리 국민을 지키지못했다. 아니 우리 국민을 지키지않았다. 해경은 사람들을 구하지않았고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은 7시간동안 얼굴 하나 비추지않았다. 서울광장 추모식에 갔었다. 힘있는 어른이 되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내 주위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 진실규명이 될때까지 유가족분들에게 힘을 실어드리겠다라고 언니,오빠들 앞에서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생활하기 바빠 언니,오빠들 앞에서 한 다짐을 잊고 지내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그날의 다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무능하고 오만한 정부는 진실을 원하는 국민에게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았다. 우리 국민 모두는 세월호의 진실을 알기 원하며 진상 규명이 될때까지 절대 포기하지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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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우리 학교는 휴대폰을 내야 해서 조금 늦게 뉴스를 듣게 되었어요.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배가 침몰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대요. 처음에 말로만 들었을 때는 심각성을 몰랐어요. 그리고 휴대폰을 내지 않았던 몇몇 친구들의 " 전원구조라던데? " 라는 말을 듣고 모두들 안심했죠... 하지만 사실은 달랐어요. 독서실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뉴스와 sns, 커뮤니티 등에는 세월호의 이야기 밖에 없었고 커뮤니티에서 세월호 학생들을 찾는 글들을 보며 어두운 독서실에서 마음 졸이며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네요.. 그때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도 다 기억이 날 정도에요.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고 곧 있으면 3년이네요. 그리고 어렸던 저는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친구들이 지금의 나랑 같은 나이였던걸 생각하니까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지 더 와닿고 아직도 마음이 찢어져요. 예쁜 친구들과 또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 때 까지 싸우고 촛불을 들어야 합니다. 절대 잊지 말자 세월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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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평소와 같은 출근날이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했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연구실에서 포털을 보며 놀라고, 전원 구조 소식에 안도하고, 그리고 머지않아 알려진 진실에 함께 슬퍼하고. 집에 돌아와서 JTBC 뉴스9을 보았던 기억만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