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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예쁘고 날씨도 풀렸지만 아직은 으슬으슬했던, 여느날처럼 수업이 듣기싫었던 날. 세시간 연강을 듣던 중 사고속보를 접했고, 쉬는 시간에 전원구조했다는 오보를 접했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그래도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절대 잊지못할 수학여행이겠네~ 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날 오후, 오보라는 소식과 함께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실종자수와 사망자수...계속해서 진행되는 뉴스속보들...그때의 상실감과 참혹함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날의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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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파 퇴사를 결심한지 한 달. 며칠만 더 출근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 날도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습니다. 업무 메일을 대충 처리하고 무심코 포털 사이트를 연 순간, 고등학교 수학여행 학생들을 실은 배가 침몰했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어요. 어떡하냐고 큰일 났다고. 큰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사무실 직원들 모두 놀라서 검색을 시작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게 뜬 속보. "전원 구조." 누군가가 외쳤어요. 다행이다, 전원 구조됐대! 그렇게 큰 배에 있던 사람들을 이렇게 빨리 다 구할 수 있나? 우리나라 재난 시스템 좋네~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 사무실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회의도 하고 업무를 진행했어요.그리고 다소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 접한 정정 보도... 전원 구조가 아니라는. 실제로 구출된 학생과 승객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그 때부터 밤이 되어 퇴근할 때까지, 업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뉴스 새로고침만 수백 번 누른 것 같네요. 한 명의 구조자라도 있을까, 종교가 없지만 무작정 기도하는 마음으로 클릭을 했지만 끝내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배가 완전히 뒤집혀 파란색 끝부분만이 동동 떠 있던 모습, 그마저도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관계자들 책임자들, 기억이 나지 않는다구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기억을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당신들의 정치 생명이 걸린 전무후무한 참사인데,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당신들이 왜 기억이 안 나겠습니까? 기억하기 싫은 거겠지요.사람들의 이런 글도, 몇 주째 이어지는 촛불도 당신들에게는 그저 미개한 개, 돼지들이 잠시 꽥꽥대는 소음으로만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똑똑히 두고 보십시오. 당신들이 하찮게 여기던 개 돼지들이, 사실은 한 명 한 명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는 시민들이, 세상을 바꾸고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입니다. 침몰하는 배에 탄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당신들 때문에 그대로 물 속에 잠겨버린 학생들, 승객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용서도 구하지 마십시오. 용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인 당신들은 그럴 자격조차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으십시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의 악행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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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날과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오후에 있어 아침에 잠깐 눈을 떴을 때 휴대폰 뉴스 속보가 왔었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고 구조중이라고. 잠결에도 큰일이다 싶어 바로 뉴스를 찾아보니 전원 구조라는 기사를 보고 다행이다 생각하며 아이들 수학여행에 평생 잊지못할 사고지만 추억으로 남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춰 일어나 준비를 하며 tv를 켜니 아침에 본 뉴스 내용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는 평범한 일상적인 날이 아니었다. 당시엔 구조자 현재는 생존자가 배에 탑승한 인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였고 아직도 아이들이 배안에 있는지 구조되어 병원에 이송되어 있는지 우왕자왕하였고 그시간까지 정부는 그 어떤 공식발표도 없었던거 같았다. 배는 아침 이른시간부터 침몰중이라도 했는데....뉴스가 틀어져 았는 tv앞에서 움질일 수 없었다. 배가 뒤집혀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아이들이 있다는데 정확히 몇명이 탑승해 있는지 숫자도 오락가락 구조자 숫자도 달라지는 상황에 그래도 구조자가 더 많아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상적인 그저 평범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으나 손에서 휴대폰을 들고 뉴스 속보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학생들 부모님들이 진도로 속히 가고 있다는 뉴스, 아이들이 이병원 저병원으로 이송되어 인원 파악이 어렵다는 소식, 배안에 있는 아이들이 보낸 메시지들... 그리고 바닷속으로 완전히 침몰한 세월호.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있는지 현실감각이 둔해졌다. 생존자 실종자 사망자 숫자가 문신처럼 떠있는 뉴스. 생존자는 왜저렇게 적고 실종자는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왜왜만 난무하던 외침. 그리고 제발 숫자가 올라가질 않길 바라는 사망자 수... 민간 잠수부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침몰된 배 안에서 아이들과 일반 탑승객을 구조 할 것이라 그래도 그정도 국력은 있을것이다 믿어왔다. 큰 배에는 에어포켓이라는게 있다니까 어딘가 옹기종기 모여 구조를 간절히 기다릴 아이들이 무사히 구조되길 기도했고 바랬다.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도 그저 나에겐 평범했던 하루가 지옥 그 어느 언저리 같았다. 모두 믿을 수 없어서 거짓말 같던 진실들. 참사 2일이 지난 시점 세월호 뉴스 아래 달린 댓글을 잊을 수 없다. 부디 실종자 숫자 그대로 사망자 숫자가 되길 바란다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지금은 그토록 바라지만 당시엔 부정하고 싶던 진실이었다. 그만큼 기적이란것을 바라왔지만 이나라엔 바라지 말아야할 것임을 이제야 안다.나는 평생을 그날의 충격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기억이, 잊지 않는것이 지켜주지 못한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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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sns에서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세월호가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것은 큰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기울어진 상태에서 설마 구조를 하지 못할까... 당연히 다 구조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그 정도 기술력이 없을까...그런데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오랜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았고 미수습자가 있고 7시간의 공백과 미흡한 대처의 실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나의 삶에 집중하다보면 잊혀지기 쉽지만, 노란리본을 달며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며 기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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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 아침 출근하기 전 잠깐 쉬면서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했었던 것 같습니다.그러다가 단원고 학생들이 전원구조됐단 소식을 접하고나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오보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오히려 희생자들만 계속 늘어나고 구조자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구조 소식을 기다렸고 다음날 다시 세월호 기사를 봤지만 돌아온 것은 기적적인 구조가 아닌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희생자들 소식이었습니다...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시신만 계속 발견되니 제 마음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기만 했습니다.제가 거의 20년간 살았던 안산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못내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절대로 그 때의 그 아픔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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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너무 지루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라는 기사를 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여행을 가던 학생들 전원 구조라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학생들도 전원 구조라니까 다른 승객들도 곧 구조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설마 다른 일 생기겠어? 라는 생각으로 학원에서 수업를 들었습니다.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핸드폰을 켜 인터넷 뉴스를 보는 중 아까 올라온 그 기사는 오보 였고 아직도 그 배 안에는 탈출하지 못한 학생들과 승객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제 일인 것 마냥 걱정되고 마음도 안 좋았어요. 제가 그 학생들과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19살 학생이었기 때문이 었을까요? 2014년 4월 16일 정말 잊혀지지 않습니다. 17일 학교를 가서도 친구들과 내내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고 쉬는 시간에도 인터넷 뉴스를 틀어 구조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심지어 밥 먹을 때도 세월호 이야기 뿐이였고 집에 와서 티비 틀고 뉴스 보고 그 때는 정말 세월호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이 나서 엄마 아빠가 체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셨어요. 19살이었던 그 때도 이렇게 생각했었지만 21살이 된 지금 다시 생각을 해봐도 정말 다시는 그런 마음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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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 어떤 날처럼 평범하게 9시 수업, 10시 반 수업을 마치고 학식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면서 얼핏 연구실 단위로 식사하러 온 사람들끼리 배가 침몰했다라고 주워들은 기억이 납니다.선박이 침몰하는 사건은 흔하지는 않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보다 생존 확률이 높겠지 하고 생각하며 뉴스 보도에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해경 선박, 해군 함정/선박이 총 동원되어서 구출 작전을 실시하고 있을거라고 믿고 오후까지 제출해야되는 과제만 열심히 했습니다. 당연히 모두 구조 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선박은 안전 규정을 위배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관련 기관은 구출작전에 매진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2년 8개월이 지나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2014년 4월 16일. 절대로 잊지 않을겁니다. 진실은 결코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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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나는 저 아이들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설문조사를 한다고 간 컴퓨터실에서 사고 소식을 처음 보았다. 그 때가 딱 제일 친한 중학교때 친구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라서 더 놀랐다. 친구는 비행기를 탔다고 해서 안심하고 별 일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결국은 그게 별일이 되어버렸다. 뉴스를 보는 순간 눈에 보이는 갈 믿고 싶지 않았고, 바닷물이 보이는 순간 언젠가 보았던 TV 프로가 떠올랐다. 그 프로는 분명 힘 센 장정들이 5월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데 저체온증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분명 3시간정도만 수영을 해도 저체온증으로 위급해지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사건 발생 후 반나절이 지났다고 했을 때는 차라리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먼저 했고, 언제부턴가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마 친구를 붙잡고 "해병대 훈련받는 사람들도 세시간만에 저체온증 걸린다는데, 쟤네는 어쩌냐" 하고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날 우리 반은 틈만 나면 텔레비전으로 구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계속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고장나서 MBC밖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필사적으로 틀고있던 반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야자 도중 옆반에 오셔서 하신 수학선생님의 "야자를 왜 하냐, 열심히 살지 말아라" 라는 말도 기억난다. 친구에게 전해들은 말이었는데도 그게 그렇게 슬프게 들렸었다. 그날이 엄마 생신이었는데도 엄마께 축하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신데 태어나서 감사한 마음보다도 저 뉴스에 나온 선생님들처럼 엄마도 위험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저 선생님의 자녀분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더 서글퍼졌었다. 며칠 간 계속 구조작업을 봤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 간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사망한 학생들의 문자와 카카오톡 내용을 봤을 때, 다독거림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반 TV가 아닌 옆반 TV에서 문자 내용을 읽고 울컥하는 아나운서와 함께 울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내 고등학교 2학년 4월 16일을. 그때의 나는 내가 왜 우는 지도 모르고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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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쉬는시간 갑자기 누가 다급하게 "안산에 있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갔다가 사고났대!" 말해서 친구들이 다 놀랐었어요. 다음 시간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다들 인터넷 연결하셔서 실시간으로 상황 보여주시고 몇몇 분은 저기 아는 선생님도 계신다면서 걱정했어요. 옆에 친구들은 같은 교회 언니 단원고 다니는데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전원구조라고 나와서 다들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보도였다고 해서 다들 욕하고 울고 분노했어요. 저희 학교는 단원고랑 멀리 떨어져서 피해 학생들을 아는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학교 선생님들은 다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 선생님들, 옛날 제자들같이 아끼는 사람이더라구요. 아직도 그때 울먹이던 선생님의 표정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지금도 제 친구 학교에서는 "가라앉는다" 같이 세월호와 조금이라도 연상되는 말을 하면 표정이 삭 굳고 조용해진다고 합니다. 2014년 4월의 어느날, 그날의 7시간은 너무 충격적이고 안타까워서 누구에게는 7년, 아니 70년, 몇십년이 지나든 7분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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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당시 우리 학교는 수련회를가서 이틀째가 되던 날, 수련 활동을 마치고숙소로 돌아와서 뉴스가 전해졌다. 그러고 3일 째가 되던 날 집에 돌아 와 한참동안 멍 하니 서서세월호 뉴스를 보고 방에 들어 가 울었다.나랑 아예 연관도 없는 일이였지만 왜 그렇게내가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였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곳에 갇혀서 두려웠을 것을 생각하고,나는 이렇게 생각없이 수련 활동을 다녀 왔는데저런 큰 일이 벌어졌다는게 믿을 수 없었음그래서 제발 모두가 구조가 되길 빌었고, 계속기도도 했다. 그 이후로 우리 학교에서 수학여행이랑 다 취소가 되고 나는 지금 고3까지 왔는데우린 거의 소풍 같은거 못 다니고 있음진짜 세월호 진실을 파헤쳐서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가지고 빨리 인양 했으면 좋겠다.그 당시 뉴스에서는 세월호를 인양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7개월 인가 9개월이라고 했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도 인양을 하지 않는다. 아직도 세월호 사건이 터진게 엊그제 일만 같다. 그렇게 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버리고 잊어 버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제발 진실이 파헤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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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문제로 학교 자퇴하고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울고 있었어. 나랑 동갑인 친구들이 바다에 빠졌다고 뉴스가 나와서 시간 갈수록 점점 더 울었던거 같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 나는 건강도 완쾌하고 설레는 20살을 보내고, 이제 못다한 공부도 다시 하고 있는데, 너희의 억울함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구나. 포기하지 않을게. 친구들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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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고 속보 기사를 봤습니다. 처음엔 "큰 일 아니겠지 금방 구조될거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전원구조 기사를 보고 "그럼 그렇지" 안도했습니다. 그런데...지금 우리는 이렇게 슬퍼하고 있네요. 국가를 너무 믿었던 것일까요?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7초도 아닌 7분도 아닌 7시간. 이 시간동안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안타까운 마음에 하루종일 울었고, 그 후로도 오랜 기간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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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승객들은 모두 구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기울어가는 배와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구조작업을 화면으로 접하며 들었던 "왜", "어째서"라는 의문과 분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 내가 가졌던 왜와 어째서에 대해 답을 듣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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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 에서 배가 잠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걱정이 되지 않더라고요. 한국이 얼마나 빠르고 민첩한데... 전 정부기관이 제 할일을 할거라고 믿었습니다. 몇시간후 다음날 아침 저는 아무도 구조되지 못한것을 알고 눈물만 뚝뚝 흘릴수밖에 없었습니다 . 국가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책감 그리고 미안함 . 저는 그날을 그리고 그 이후를 기억합니다. 국민은 어디에 살고있든 절대로 그날을 잊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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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출항할 때 다음날의 학원을 위해 숙제를 하고 있었고 세월호 안에서 단원고 학생들이 레크레이션을 즐길때 꾸벅꾸벅 졸며 책상에 엎드려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세월호가 이상한 낌새를 보일때 학교갈 준비를 하며 친구와 어디서 만날지 전화하고 있었고세월호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할 때 두번째 줄 세번째 분단의 의자에 앉아 수학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세월호가 무너져 내리고세월호에 탄 모든 사람들의 생명빛이 하나둘 꺼지고그런 세월호를 지켜보기만 하는 대통령이 해야하는 명령은 안 내리고 그저 여러사람과 악수만 나누고 있을때저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습니다.많은 학생들의 빛나는 졸업사진이 검은 테두리의 액자 안에 들었는 사진으로 대체되고아기가 아기를 위해 희생하고수백명 수천명의 가족의 미래가 처참히 짖밟히게 되어버린 이 사건이 막을 수 있었을 때저는 평소처럼 행동했습니다.그저 평소처럼, 아무 일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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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엄마가 맹장수술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같이 뉴스를 보는데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분명 뉴스에서 전원구조를 봤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진짜 다행이라고 그러고 있었는데 구조자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청와대는 보고했다고만 하고 대통령이란 사람은 보이지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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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기를 타고 공중에서 조명탄을 수만발 터트리는 작업에 참여했었습니다. 당시 군인이었기에 사건이 터진 당일,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몰랐고 후에 TV 속보들을 보고 이 사건을 알게됬죠무척 힘들게, 그리고 간절하게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종자를 끝내 찾지 못하고 일단락되어서 정말 안타깝고 그때의 기억이 정말 제 삶에서 커다란 경험이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이 세월호사건과 제가 밀접했던만큼 그 긴박했던 구조의 순간에, 국민들이 애타는 그 시간에 대통령은 진짜 뭐 했냐는 분노가 정말 큽니다. 대통령의 7시간은 정말 꼭 밝혀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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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집에 돌아 오는 길의 버스.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내가 탔던 배가 뉴스에 나왔다. 아마도 안타까움은 그 상황이 나와 잠깐이나마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인지 더욱 다가와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핸드폰을 끌어내리면서 소식들을 봤다. 얼마나 무서울까. 나는 지금 버스가 덜컹 거리는 순간에도 퍼드득 거리는데. 그리고 바로 올라온 속보에는 모두 안전하게 구출 되었다고 했다. 좋은 기억만 있어야 하는 수학여행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모두 집에가서 따뜻하게 이불 두르고 있었으면. 하고 안심했다.날조된 안심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 그 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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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날에 인터넷접속도, 티비도 틀지않고 있다가 다음날에서야 문명을 접해 알게 된 사고...처음에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나더군요. 날씨가 추워지면 더 생각나곤 합니다. 물에서 얼마나 추웠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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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센터에서 오신 장애인분들 진료를 보고 있었습니다.정확히는 사고났다는거 보고 그분들이 오셔서 중간중간 기사를 확인하며 복지관 선생님과도 얘기 나눴어요.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보고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진료에 집중했고 진료가 끝난후 모든게 거짓인것을 알게되었어요.같은 지역의 아이들이 대다수였던 일이라 더 생생히 기억하네요. 그아이들중 제게 치료받은 아이도 지인의 동생도 친구동생의 절친도 포함이였어요.모두가 기억하는 그날을 기억못하는건 말이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