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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수학시간 수업 중 먼저 선생님께서 얘기를 꺼내셨다.전원구조 됐다고한다. 걱정말고 수업하자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오보란다.반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도 당연히 구하겠지 했다.하지만 날이 갈 수록 좌절했고, 내 친구들을 필두로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았다.그리고 아직 까지도 밝혀지지않은 진실.누군가에게는 당연하다고 믿어졌던 국가의 존재언제쯤이면 모두가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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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평소처럼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말했다. 웅성거리며 TV를 켰는데 전원구조라고 나오길래 다들 안심하며 Tv를 꺼버렸다. 그날은 후배들과 점심모임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샤브샤브집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전원구조라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샤브샤브를 맛있게 먹었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점심먹고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전원구조가 아닐 수도 있단다. 그리고 사무실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14년 4월 16일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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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수험생 신분의 한낱 학생이였다. 자습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의 말씀으로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았다.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전복되었다더라." 같은 교실안에 앉아 있던 우리 모두는 안타까워했다.얼마 후 올라온 소식, 모두가 구조 되었단다. 아, 정말로 다행이다. 그런 후에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마저 공부를 하고 있었다.그런데,오보였단다. 아직 너희를 구조하지 못하였다더라. 그 이후에 우리는 모두 패닉 상태였지. 점심시간에도 모든 아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했어. 비록 같은 학교 학생이 아닐지라도 당장 복도를 지나치며 만날 수 있는 그런 너희들이, 아직도 차디 찬 바다에 있다니... 하지만 일은 진척이 없었고 모두가 발만 동동 굴렀다.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였고 너무나 무서운 일이였다. 나는늦은 새벽까지 잠자지 못하고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 그저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 단 한명이라도 기억을 더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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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개월다닌 회사에서 짤린지 한달정도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오전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이 다 구조되었다는 라디오였는지, 신문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 기사를 보고 우리나라 빠르게 대처했네 라고 넘겼는데 .. 한시간정도 있다가 구조되지 않았다는 기사들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안에서 죽어갔단 기사들을 보고도 나의 힘듦이 더욱힘들었습니다. 이제서야 아이들이 추운바다에서 죽었다는게 어떤의미인지 알것 같습니다. 나만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관심했었습니다. 이제는 이웃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힘듦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게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죽음은 매우시리고 아프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시민의식을 일깨워 준 희생이 되어 주어 고맙고 미안합니다... 평생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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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하고있는 중에 뉴스를 봤어요. 믿기지않아서 동료들과 걱정하는중에 전원구조라는 소식을듣고 안심했다가 다시 오보라는 충격적인 소식. . . 진짜 일이 손이 안잡힐정도로 걱정에 휩싸여있다가 배가 점점 기울며 가라앉고있다는 뉴스에 망연자실하고 배안에서 분명 살아있을것이라고 희망도 가져봤어요. 그이후에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모습을보며 많이 울고 함께 분노했습니다. 안산합동분향소의 그 많은 영정들 앞에 섰을때는 가슴이 너무 아파 울부짖듯이 눈물을 흘렸네요. . .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사고를 만든 책임자들이 모두 합당한 처벌을 받을때까지 계속 감시하고 목소릴 높여 항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모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꼭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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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했고,인터넷으로 간간히 소식을 듣다가,구조가 다 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고 있었고,그런데 아니더라는 말은 들었지만그래도 하나둘씩 구하고 있었겠지라고만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퇴근하고 집 근처 밥집에서 밥 시키고 기다리는데,아직 속보가 계속 나오고 있었고,문득,아침 몇시에 속보가 시작됐는지 떠오르면서왈칵 눈물이 났습니다.믿을 수가 없었거든요.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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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보고 별일아니라고 넘긴 나자신이 원망스러워.너희가 두려움에 떨고 죽음과의 사투를 벌일동안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을거야.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정말 하염없이 울었던거같아. 미안해, 잊지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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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3교시즈음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수업을 듣던 중 선생님께서 "지금 배가 하나 침몰했대.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많이 타있던 배였나봐. 다행히 전원 구조됐대" 라는 말을 하셨고 전원구조라는 말에 어수선하던 교실은 잠잠해졌었다. 사실 그 날이 있기 전 주에 우리 학교도 수학여행을 갔었다. 청해진해운이 운행하던 또다른 배인 오하나마호를 타고.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몇몇 남은 수업들을 듣고 석식을 먹고.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의 티비에서 나오던 자막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사망자의 수와 구조된 사람들의 수, 아직 배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힌 자막이 티비 하단에 흘러가고있었다. 투지폰을 쓰고있던 때라 바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티비를 켰다 뉴스를 할 시간이 아니었는데 뉴스가 나왔다 화면에는 팽목항의 상황이 보도되고 있었다. 이것이 내 머리속에 남아잇는 그날의 기억이다. 우리는 295명을 떠나보냈고 아직 차가운 바다에는 가족을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다. 2년하고도 수많은 날이 지난 오늘. 몇몇 사람들은 세월호를 잊고 덮으려 하고있다 "인양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비효율적인 선택이야.", "아직도 바다에 남아있을리가 없잖아." 등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사고를 하며. 또한 이 사고가 지난 이후 구의역에서 청춘을 마감한 20세 스크린도어 정비공. 우리 사회는 아직도 똑같은 비보를 전하며 변화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를 위해서, 또 그들을 위해서. 잊어서는 안된다.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한다.우리는 기억합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아직까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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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지시를 받고가만히 있던 아이들은 가만히 바닷속으로 떠내려간다.최고 지도부는 가만히 있는다.그렇게 가만히 승객들은 죽어나갔다.대통령은 그날 집무실에서 가만히 서면보고를 받기만 했다.서울역 시민들은 참사 뉴스를 보면서 가만히 서있었다.그 날 우리 모두는 가만히 있었지만배 속에 있던 아이들은 발버둥 치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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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이 타고 있는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제 주변의 모두가 숨이 멎은 채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습니다.제가 2014년 4월 16일을 떠올릴 때 처음 기억나는 장면입니다. 다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뉴스란을 새로고침하고 있었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클릭 소리만 가득했습니다.그리곤 전원 구출이라는 뉴스가 뒤를 이었습니다. 다들 안도의 숨을 뱉었고, 안산이 고향인 선배는 전화기를 붙잡고 교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들 무사한 게 맞는지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들으며, 전 모두가 무사하다는 뉴스를 듣고도 몸이 떨리는 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직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수백명이 탄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뉴스가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몇명도 아닌 전원이 구조됐다는 뉴스가 나오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겠죠.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전원 구출은 오보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전화를 걸었던 형님은 걸 곳을 못 찾는 전화기를 차마 놓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자에 앉지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도 못해였고요.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보 이후 구출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생존자 수는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점점 더뎌졌지요. 여객선은 가라앉고 있는데. 왜 생존자 수가 늘어나질 않는지. 도대체 현장에 무슨 일이 있는지....이게 제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입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 날의 기억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생존자들의 안녕을 빕니다. 왜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를 바랍니다.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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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소중하고 예쁘고 사랑스런 우리집 둘째.딸의 생일입니다. 4월 16일은...2014년 4월 16일 아침.4살 생일을 맞아 3살터울의 오빠 손잡고 어린이집에 가면서 "엄마. 이따 케익 먹을꺼에요. 아빠 오면 파티해요" 하고 쫑알쫑알 거리는 딸램을 보며 마냥 행복하게 시작한 아침이었습니다.황사와 미세 먼지 걱정에 마스크 단단히 씌워 보냈던 아침이었습니다.아이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뉴스에는 계속 세월호 소식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딸의 생일보다 세월호 아이들의 무사 구조만 기도했습니다. 7살, 4살 두 아이가 배안의 언니, 오빠, 형아 누나들 언제 다 구조 되냐고 물을 때마다 두 아이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매년 딸의 생일엔 이렇게 얘기해 줍니다."너가 태어나서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한 날이지만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떠난 슬픈 날이 되었어. 니가 자라는 동안 평생 너의 생일과 함께 잊지 말기로 하자"이제라도 꼭! 그날의 진실이 인양되어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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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6 세월호가 침몰했다. 뉴스는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답했다.정부의 발빠른 대처였다면 7시간 동안 무능한 정부의 묵묵부답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희생자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또는 대학에 합격해 신나있는 학생이었을테고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을테고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한 아이의 엄마였을 것이다.정부는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한 나라의 대통령은 몇 주간 이어지는촛불시위에도 국민들의 외침에도 귀를 막고 있다.침묵하지 말아라.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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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대학 영어마을 실습날로 아침부터 바쁘게 대구에 있는 학교로 향했다. 영어마을에 도착하여 내가 맡은 아이들을 그 시간에 맞는 교실로 이동시켰고 지하 카페테라스로 내려갔다. 테라스에는 이미 다른 친구들이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고 나도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하며 핸드폰을 만지며 모 커뮤니티에서 세월호 침몰소식을 듣게된다.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과 " 야 어떡해 배 침몰했대!!!" 걱정을 나눴고 10분도 되지않아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기사를 보게된다. 당연히 일찍 발견하고 주위에 다른 어선이나 배들이 있었으니 다 구했겠지 하며 모두 같은 마음으로 걱정을 쓸어내리고 쉬는시간 종이 울리며 각자의 반 아이들을 이동시키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의 전원 구조라는 기사를 봤기에 세월호침몰에 대한 걱정은 없이 영어마을에서의 시간은 흘러갔고 학교로 다시 향하는 차안에서 조차도 평화로웠다. 그 뒤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기사가 오보였다는 기사가 뜰거라는 생각은 한 치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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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 대학생이었는데 다른날과 똑같이 수업을 듣고 있다가 뉴스 기사가 뜨는걸 보고 알았습니다.. 학교 수업에도 집중을 잘 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5분단위로 핸드폰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 동생과 같은 나이 고2...어린 친동생같은 아이들이 제때 구조되지 못해서 사망자 수가 늘어가는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골든타임을 놓쳐서 제때 구조가 진전이 안되는거에 답답함을 느꼈고 애가 탔습니다.. 아는 동생이 한강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물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저는 그날 밤에 잠도 자지못하고 무서워서 마치 아이들이 꺼내달라고 방 바닥에서 얘기하는거 같아서 불도 켜고 잤습니다..그리고 다음날 다다음날 결국 구조하지 못하고 인양작업얘기에 안타까움만 더하고 눈물흘렸습니다. 지금도 세월호 관련 캠페인,물건들에 늘 참가하고 있습니다. 잊지말고 가슴속에 늘 간직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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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취업준비생이었습니다.나갈 채비를 하며 아침 뉴스를 들었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구조됐다는 뉴스에 다행이다 생각하곤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스터디 2개와 보습학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녹초가 된 몸으로 한 평도 채 안되는 고시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습관적으로 티비를 켰지만 다시 끄기까진 한참이 걸렸습니다.그 7시간동안 제 삶에 허덕이느라 같이 걱정하고 기도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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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저는 어느때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오전수업을 듣는데 한 선생님께서 세월호 당시 상황을 뉴스로 접하고 오셔서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고 같은 또래라 실시간으로 놀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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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었네요.독일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자신들에게 전달된 뉴스를 보고 분노하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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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사실 학기 초라 많은 친구들과는 친하진 않았지만 말도 많이하고 친해 질려고 많은 친구들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쉬는 시간에 우리는 인터넷을 보았다. 실시간 검색어에 "세월호"라는 검색어가 떠 있었다. 내 친구는 그것을 검색 하였고 인터넷창 안은 배 사진으로 가득하였다. 기사는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물로 가라 앉고 있다는 것이였다. 모든 아이들은 걱정을 하고 "안타깝다","우리도 고등학교 가서 제주도 가는데, 무섭다." 그 때 중 3이였던 우리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사에 "모든 사람들 구출"이라는 문장이 올라왔고 그 때서야 우리는 안심을 하고 컴퓨터를 껐다. 많은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많이 공부를 한 후 하교 후 집에 갔다 . 언론은 여전히 바빴고 분주했다. 모든 사람들은 무슨 50퍼센트도 나오지 못 했었다. 난 그곳에 있지 않은데 더 불안한 마음이였다. 구명조끼가 없다는 말,친구들이 아직 안에 있다는 말,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한 말 등 많은 말이 나왔고 뉴스 상단에는 구출자가 몇 명인지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해경은 침입을 못 한다고 하였다. 배는 점 점 가라앉아 배 하단의 앞 부분만 보일 정도인데, 엄마와 할머니는 모두 마음을 아파하였고 내년이면 수학여행을 갈 나와 나의 친구들을 걱정하였다. 2년 사이 모든 것은 바꼈지만 나의 마음은 바뀌지 아니한 것 같다. 여전히 페이스북이나 기사을 보며 세월호가 연관된 기사들은 무조건 챙겨 본다. 그럴 수록 우리나라에 대한 불신은 커져 갔다. 난 아직도 단원고 학생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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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사고가 났다는 짤막한 속보 기사를 보았다. 얼마 후,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앞선 긴박하고 조마조마한 한 줄의 속보가 지워졌다. 그렇게 지워질거라 믿었다. 거대한 배의 사고가 일어났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길 바랐다기 보다는 확정되어졌다 라는 표현이 맞다고 해야 좋을 아침이었다. 이후로는 일상이었다. 그저 스치는 바람에 일상조차 스쳐 지나가 버린 하루하루였다. 열심히 사는 것, 한 사람의 몫을 오롯이 해내는 것. 그 모든 것이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한 줄의 속보를 읽고 또 한 줄의 속보를 믿고 스친 그날의 시간은 오늘도 여전히 스쳐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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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예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그 날은 어두운 저녁 하늘과 함께어두운 소식을 맞이했다입시에 떠밀려 불만에 가득차 집에 왔을 때그들은 떠내려 앉았다방 의자에 앉아 소식을 접하며바닷물에 한참 못미치는 눈물을 뱉었고티비를 보며 구조인원의 숫자가 올라가길하염없이 기다렸다마지막 문자를 보며그들을 기억하겠다며 다짐했는데어느새 그 날은 잊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