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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입구역에 살고 있었다. 그 날은 수업도 없고 해서, 방에서 리포트를 적고 있었다. 잠시 기분전환한다고 웹서핑하고 있는데, 배사고 기사가 속보로 났다. 바로 티비프로그램 접속했는데 믿기지가 않더라. 해군출신이어서, 배사고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사람들보단 더 알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중요하게 배우는 게 배침몰시 "이함"하는 방법인데, 침몰할 게 뻔한 상황에서 왜 도대체 왜 이함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근해라, 구명조끼 찬 상태에서 이함만 제대로 했더라면, 거의 대부분 정말 어쩌면 수백명 모든 사람들이 생존했을텐데...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가 솟구쳤다. 리포트고 뭐고 접어두고 몇시간 동안 내 방 책상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고통과 무서움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 날의 내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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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이었던 그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남자친구와 점심을 먹고있었습니다. 오전에 간단히 소식을 들었지만 전원구출이라는 얘길 듣고 가볍게 넘겼었는데, 아니더군요. 결국 밥도 다 못먹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울면서 수업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뒤에 근처에 세워진 분향소에서 노란 리본 달아놓고 혼자 울다가 왔었어요. 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때 그 기분, 상황 모두가 영화처럼 머릿속에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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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을 보던 고시를 접고 다른 길을 모색하던, 석사 마지막 학기였습니다. 여느때처럼 학교에 오고, 수업 없던 친구와 동원관에서 밥을 먹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전원 구조"라는 소리에 별거 아닐 거라며, 저녁에 술이나 먹자며 농담하며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고... 랩탑을 켜고 습관처럼 다음과 네이버를 돌다가 별안간 굳어버렸습니다. 오보였다니. 어디서 느껴지는 지 모를 한기, 4월의 몸서리에 휴게실로 나가 TV를 켜고, 신문사 홈페이지를 뒤지고.. 며칠간은 잠도 제대로 못잤던 것 같아요. 뭔가 새로운 소식이 나올까 하며. 가라않지 않은 희망을 기대하며. 봄날의 기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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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사고가 났지만 전원구조됐다는 오보를 듣고 그간 여러번의 대형사고를 경험하면서 우리사회가 이제 그정도 시스템은 갖추어졌나보다 안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간 식당에서... 그사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고 충격과 안타까움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tv 화면 속 완전히 뒤집어진 세월호를 지켜보던 그때 그 장소와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오후 내내 일은 손에 안잡히고 너무도 적은 구조자수, 늘어가는 사망자수, 심지어 계속 바뀌는 탑승인원... 숫자들을 지켜보며 안도는 당혹감과 공포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부끄러움과 원망으로 바뀌었죠. 구할 수도 있었던 황금같은 시간, 기회들을 다 흘려보내고, 꽃같은 아이들을 허망하게 그렇게 보냈다는 것,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도 세월호 세글자, 노란리본을 보면 코끝이 시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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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간호학과 학생입니다.그날 오전 보건소 실습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에 들렀습니다.실습에 지치고 피곤한 와중에 뉴스를 보니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더군요.정확한 보도 내용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영화처럼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오히려 멍했던 기억입니다.평소처럼 밥을 먹고 오후 실습을 이어갔던 그 날의 기억이.. 너무도 무뎌져 덤덤했던 그 날의 내가 부끄러워서 계속 그 날이 떠올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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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당시 의전원1학년이었어요. 원래 지각을 안하는 스타일인데 전날 시험 끝나고 늦잠을 잤어요.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니 선박 사고가 있었고 "구조 중"이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씻고 동기들과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세월호 사건이 티비 뉴스에 나오고 있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뉴스를 보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돌아갔어요. 집에 갈때 다시 기사를 찾아보니 안타까운 소식만 나오더군요.저는 그 날 주황색 니트에 청바지, 흰 운동화를 신었어요. 제가 뭘 입고 뭘 먹었는 지 다 자세히 기억나요. 그런데 이 날을 정치인, 그리고 의료인까지 기억이 안난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안타깝고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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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었다. 평소처럼 인터넷 잉여질을 하느라 스랖의 "개구리" 분탕질도 실시간으로 봤다. 다들 구조됐다는 오보에 안도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학교 도서관 컴퓨터실에 앉아있었고 햇살이 화창했다. 그런데 뉴스를 보는 나는 끝없이 울고 있었다. 미국 교수님한테 메일이 왔다. "한국에 큰 비극이 일어났던데, 혹시 네가 아는 사람들이 사고를 당한 건 아니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 대해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다면 나는 언제든 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단다." 내가 미국에 있다는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말을 잃게 만드는 이 비극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어서. 다들 화창한 봄날에 즐거운데 나는 즐거울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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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논문 데이터 수집을 위해서 지방의 한 대학에 출장을 갔습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봤던 기사를 기억합니다. 수학여행 중 배가 침몰했는데 다행히 전원 구조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험 참여자들이 예비교사였고 저 역시도 교사이기 때문에 전원 구조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오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냥 거의 구조 되었다고 다행이라며 실험 참여 학생들과 웃으며 수학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전원구조 기사는 오보였고, 아이들은 살아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이 생생합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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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고3이었다. 머리카락과 모의고사 답지가 발에 채이는 교실에서 우리는 중간고사를 보고 있었다.날은 화창하고 바람은 따뜻했다. 학교 뒤뜰로 난 창문 하나로 나뭇잎들이 보였다. 누가 뉴스를 보고 뛰어왔다.아이들은 울먹거렸다. 울음 많은 여자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손을 붙잡고 핸드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몇이 살았대. 몇은 죽었대. 다 살았대. 기도하는 손들이 떨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점점 속이 메스꺼워졌다.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자꾸 조금씩 눈물이 났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기숙사에 가서 라디오를 틀었다. 열한시가 되도록 이어폰을 꽂고 열심히 들었다. 뉴스에 더듬거리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판을 가져다 놓으라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통을 치는데 그래도 믿을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녁이 다 되도록 상황판 하나 체육관에 안 갖다 놓은 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다음날 선생님이 들어와 이야기했다. 선장 탓만 하는 놈들을 조심하라고. 그 말이 정말 맞았다. 그 선생님은 박근혜가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왜 그날 뉴스는 박근혜가 상황판 좀 갖다 놓으라는 말, 고작 그걸 첫 꼭지로 내보냈을까. 왜 일곱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해경이 들어가서 구하지 않은 것을 내보내지 않고 아수라장이 된 진도체육관만 집중적으로 내보냈을까. 우리는 제 자식들이 빠져 죽어가는 생지옥 앞에서 절망하는 유가족들을 미개한 놈들로 전락시켰다. 우리가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짐승으로 전락시켰다. 그날 우리가, 우리의 국가가 한 것은 고작 그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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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아르바이트 하던 사무실로 출근해서 같이 일하던 직원이랑 화장실에서 얘기하다가 세월호 기사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에 전원 구조라는 기사를 보고 그래도 다행이에요. 라고 얘기했는데 오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이 더 거짓말이길 바랬었던 시간이었습니다.점심을 먹을 때에도 퇴근해서도 티비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그 시간 저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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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들 어린이집 등원시키고 집으로돌아와 티비켜서 그날의 방송을 지켜보며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흘리며 어떻해 어떻해 만 하고 지켜보기만 햇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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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는 병원티비로 세월호 사고 소식을 봤었어요. 몸이 좋지못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티비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다행이야 라고 했다가 오보라는 얘기에 정말 충격받았었던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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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아침 아이들 등원준비시키면서 티비로 사고소식을 접한게 또렷하게 기억납니다전원구조라고해서 다행이라생각하며 가슴을 쓰러내렸었는데 그아이들이 아직도 돌아오고 있지못한다는게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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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구조되었다는 속보에 다행이라하며 더이상 뉴스에 집착하지 않고 아침을 시작했답니다.그러다 오후가 되어서야 비통한소식에 너무 마음이 아파 돌아온아이를 꼭 안아줬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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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뉴스 접하고 전원구조라길래 안심하고 수업했는데 오보라 하고.. 학교 계신 모든 선생님들과 걱정하며 뉴스 검색해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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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강의시간 창공실 맨 앞쪽 오른쪽 구석 테이블에 동기들과 앉아 있다가 네이버뉴스기사로 처음 소식을 접했어요 전원구조 성공이라길래 다행이다 하고 강의 듣다가 친구가 갑자기 문자로 "전원구조가 아니야 혁이 아직도 배 안에 있어 제발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줘 지금 다 거짓말이야 도와줘" 라는 문자를 받았고 뭐지..?하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 친구한테는 "상황이 지금 정리가 안되서 인원파악하고 뭐하느라 동생 아직 못만난거니까 다 전원구조 됬다니까 꼭 혁이 금방 만날꺼야 진정하고 기다려보자"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구하지못한 아이들 숫자는 늘어가고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기사가 뜨고..그렇게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어요 친구의 동생이 희생자가 됬어요. 그 와중에도 나는 친구에게 기다려보자고 했네요..그 기다리라는 말때문에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는데...너무 충격적이라 그때 시험준비기간이었는데도 손떨리고 정말 집중이 하나도 안됬어요 몇일을 내내 뉴스기사만 손떨며 지켜봤어요 그리고 혁이의 장례식날 안산에 잇는 온 장례식장이 자리가 없어서 저멀리 시흥에 있는 장례식장에 간 날동생의 모습을 보고 울부짖으며 "혁아 일어나 집에가자 누나랑 가자"하던 친구의 울음이 잊혀지지가 않아요제 동생의 친구도 희생자에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기전에 예쁘고 좋은 새옷 입고 간다고 쇼핑 같이가자해서 같이 옷도 고르고 동생 친구가 여행캐리어 없다고 해서 자기 캐리어도 빌려주고 안개때문에 배가 출발하지 못한다고 했을때 서로 카톡보내면서 "누나 친구 배 안개때문에 못떠서 수학여행 못갈지도 모른대" 라고 말했었는데...친구가 구조자 명단에 없던걸 확인하고 제가 "괜찮아 금방 구조될꺼야"라고 말했을때 이미 누구도 믿지 못하던 동생의 눈이 기억나요 몇일 내내 방안에 박혀서 나오지 않던 동생...그리고 친구의 장례식을 다녀왔던 축 쳐진 동생의 어깨도 저는 기억이 나요저는 저 모든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라 다 이렇게 기억이 나는데...어떻게 저 시간을 기억 못한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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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절대못잊어요ㅠ둘째를 새벽에 낳고 잠깐자고일어났는데 침몰된 세월호를보고ㅠ꿈인지생시인지했네요 누군가의 탄생이 있는반면 안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 공존하는.. 꼭밝혀지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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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전원 구조되었다길래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하지만 곧 오보라며 200여명이 배 안에 갇혀있다더군요. 그날 하루종일 언제 구조되나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왔다는 문자들이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기사로 공개가 되었는데.. 같이 가슴 아파했고 함께 마음 졸였습니다. 도대체 왜 구조가 안되는 건지, 배가 아직 다 가라앉지 않았는데 왜 가라앉는 걸 지켜보고만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던 7시간. 모두가 마음 졸이고 한 마음으로 뉴스만 붙들고 있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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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복학생이었습니다. 뉴스속보를 통해 처음 세월호 사고소식을 접했고 계속해서 뉴스에서 보도되는 침몰상황을 지켜봤습니다. 사실은 너무 평범한 날이어서 무엇을 입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학관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었고 계속해서 tv와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배가 저렇게 천천히 가라앉으니 한명씩 구출하면 모두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낙관했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아이들은 구조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가슴이 아파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살고있다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추가 생존자가 한명이라도, 제발 단 한명만이라도 더 구조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다는 더이상 아이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우리에게는 대체 왜 라는 질문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하루이틀이 지난게 아닙니다. 2년하고도 반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이 배는 왜 침몰했고 아이들은 왜 구조되지 못했나. 사건을 조작한 정황이 여러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왜 관련자들은 이 의혹들을 덮으려고만 하는가. 진실은 규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답을 구하는건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할 숙제입니다. 이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도록 방조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침묵만을 지킨다면, 우리는 또다른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다시 바라만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세월호 7시간. 우리는 그 시간동안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양심을 가진 한명의 인간으로서 그 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한 싸움이 될지라도 세월호의 진실규명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힘쓰겠습니다. 저에겐 그 시간을 잊을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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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일하다 기사를 보고 바로 전원 구출이라는 말을 보고 안심했었어요 점심시간에 회사동료랑 밥먹으면서 그얘길하고 있는데 식당tv에서 배가 거의 침몰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걸로 기억이 나요 그후로 기사를 실시간으로 봤지만 청천벽력같은 소식만.. 첫 전원 구출이라는 오보가 아직도 분통이 터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