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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속보를 접하고 팀 선배들한테 알렸어요. 큰 배가 침몰했다고. 근해였고 속보가 생중계로 뜨길래 다들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회사가 언론사 건물에 입주해 있던지라 점심 먹으러 나가고 들어오는 길에 엘레베이터에서 뉴스를 계속 볼 수가 있었는데 전원 무사구조라길래 참 다행이라고 여기고 모두 안심했습니다. 오후에는 출장을 나갔는데 버스에서 뉴스를 보니 전원구조가 아니더라고요. 외부 업체와 회의를 하면서도 계속 뉴스와 각종 게시판을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은 점점 지나갔지만 그래도 괜찮을거라고..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눈에 뻔히 보이는 배에서 사람 꺼내는 건 금방 할거라고 희망적으로만 생각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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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회사에서 교육업무를 하고있는데, 그날도 교육을 운영하느라 정신이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 와중에 그 소식을 듣고 강의장과 사무실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계속 폰으로 뉴스를 새로고침하면서 구조자 숫자 늘어나기만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총 탑승객 숫자조차 계속 이랬다저랬다 하는 걸 보면서 답답하고 먹먹했었어요... 바로 전 주말에 배타고 친구들이랑 대마도를 갔다왔는데, 바로 배사고가 나니 더 섬뜩해서 같이 갔다온 친구들과 카톡하고 그랬네요..학생들 사연이나 부모님 오열 기사를 보며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나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에선 수온에 따른 생존여부? 이런걸 보도하는데 우리나라 언론은 세월호 보험금 얼마? 따위를 보도해서 열받았던 기억도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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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해서 뉴스를 보고 충격을 금할수 없었다. 이어 곧 전원구조라는 속보를 보고 한숨 돌리고 업무를 시작했는데, 평소 맛있어서 즐겨가던 식당에서 친한 후배와 점심을 먹던 중 식당에서 틀어놓은 TV에서 흘러나오던 뉴스로 침몰하는 세월호 영상을 보면서 그 맛나던 음식들이 아무 맛도 나지않고 한숨만 쉬며 식사를 마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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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없어서 교무실에 있는데 앞자리 선생님이 소리지르며 뉴스 좀 보라고 했다. 제발 모두가 구조되길 바라며 공강 시간 내내 뉴스 새로 고침을 했다. 애들이 불쌍해서 다른 선생님들 모르게 자꾸 눈물을 훔쳤다. 걱정되고 불안해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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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3학년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뉴스를 보았다.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앞바다에서 구조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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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시험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그 날, 깊은 한숨을 입에 달고 학생회관 식당 문을 열었다.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이 티비로 향한 걸 의아하게 생각하며 배식을 받고 항상 앉던 ytn 뉴스 앞 자리에 앉았는데, 큰 배가 뒤집어져 가고 있었다. 아이고 어쩌다 저런 일이.. 하지만 방송국도 구조대도 이미 도착해 있으니 별 일 없이 구조되겠거니 생각하고 밥을 허겁지겁 해치우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러 다시 찾은 식당, 아직도 구조 화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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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났을 때 제가 있는 곳은 오후였고, 구조했다고 들어서 신경 안 썼어요.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았어요. 에어포켓 얘기를 하면서 희망을 심어줬기 때문에 핸드폰 손에 쥐고 자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사부터 확인하는 시간이 계속되었어요. 한참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라, 공부 못하고 뉴스 보면서 울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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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카톡방에서 사람들하고 웃고 떠드는 중에 뉴스를 봤다. "학생들 수학여행가던 배가 침몰했대요!" 하자 모두들 깜짝 놀라서 그제서야 뉴스를 챙겨보는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전원구조했단다... 하다가 오보였다고 하고 구조자 실종자 숫자 계속 뒤바뀌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인터넷 뉴스를 계속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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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출퇴근을 하는 회사에 다닌 탓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후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배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기에 전원 구조됐다는 뉴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출근을 했다. 출근 후 점심식사를 하고 업무를 하던 중 담배를 태우기 위해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과장님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세상에... 오전에 당연하게 믿고 있던 뉴스는 사실이 아니었다. 평소에 세상일에 관심이 없던 과장님과 함께 생중계를 보며 걱정을 했다. 빨리 구조해야 할텐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구조된 사람의 숫자는 늘어나질 않고 있어다. 퇴근시간이 되어서 대학원 연구실 선배에게 연락을 하여 술을 한잔하며 대화를 나누다 울었다. 세상이 이럴수는 없다. 마우나 리조트 사건의 희생자들을 또 다시 떠올렸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울 시절을 다 누리지 못 하고 떠난 대학 신입생들... 그리고 이번엔 공부만을 강요당하고 성적으로 스스로를 줄세우고 살아가는 그 어린 고등학생들이 바다속에 갇혀있다. 너무너무 슬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왜 나는 이런 세상에 살아가야 하는가. 왜 나는 이런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았나. 미안하다. 슬프다. 서럽다. 이런 복합적인 슬픔이 찾아와 집에 와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되는 뉴스 생중계를 틀어놨다. 그날은 잠을 제대로 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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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이라 아침부터 학교도서관에 있느라 몰랐는데...저녁에 집에 와보니 배가 뒤집어져있다고했다.배가뒤집어졌고 안에 학생들이 있다고?!다들 에어포켓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미 죽은거나 다름없다며 혀를 끌끌찼다. 내가 생각해도 이미 선실에 물이 꽉 들어찼을텐데... 물에 들어가 1분도 못버티는 나로서는 아침부터 뒤집어지기 시작한 배에서 저녁까지 생존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것 같았다.일부러 병풍도 근처에서 앵커를 내리고 운행한 기록을 밝혀낸 다큐멘터리 감독의 영상을 봤다.일부러 배의 행적도 다르게해서 내보내고..진짜 300인 재물설이 맞는것같은데 언론에선 시술 이야기만 한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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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들어간지 얼마안된 1년차시절. 그날따라 사람도 별로없고해서 오전에 보호자대기실에서 무심코 TV를 틀었다가 나오는 뉴스를 보고 충격에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료들과 전원구조 소식을 듣고 정말 다행이라며 얘기했는데.. 그게 오보임을 알게되고 ,아직도 수백명의 사람을 태우고있는 그 큰배가 물밑으로 가라앉아가는 모습을 보며 한없이 참담하고 가슴이 답답했던..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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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6호봉땡땡이까고 생활관에서 티비 보는데군기강담당관이라는 놈이 와서우리부대에 세월호 유가족 있는지 전 대대에 확인하라고 했다의사야 나보다 기억 안난다는건 기억하면서진료한건 어케 기억 못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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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바다에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중도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전원 구조는 오보였고 아직 구조되지 않은 학생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친구와 슬픔에 가득 차 연락을 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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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전원 구출 됐다는 ytn 속보를 보면서 학식을 먹고있었다. 그러고는 수업시간에서 만난 친구들과 뉴스 봤어? 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각자의 수학 여행 이야기를 떠올렸었다. "나는 비행기 타고 갔는데 난기류를 만나서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어쨌든 큰 사고가 날뻔했는데 다행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책을 폈다. 그리고 자취방에 들어와 스랖을 읽으면서 전원 구출은 완전 잘못된 이야기였단걸 알았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뉴스를 봤냐고 물었고 정말 큰 일이라고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아마도 내 목소리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둘은 동시에 남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동생도 똑같이 1년 전에 배를 타고 제주도에 수학 여행을 갔다왔었다. 저 세월호에 탄 아이들이 내 동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난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그렇게 소중한 이들을 차가운 바다 속에 잃은 사람들은 마음은 어떨지 지금도 짐작도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서, 한 명이라도 나와주기를 바라면서 계속 뉴스를 읽고 게시판을 새로 고침하며 밤새 울었던 것 같다. 모두 구출 됐다는 속보가 나오고, 그게 거짓으로 밝혀지고. 하루 종일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 강제로 태워진 기분이었다. 과거의 하루 하루를 모두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강렬한 감정을 느낀 순간과 함께 한 일은 기억이 남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은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슬픔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핑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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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시간들만 떠올리면 온몸이 아프다. 자식을 둔 사람들 모두 그랬을 것이다. 직장에서 네이버 뉴스로 접하여 내내 실시간 뉴스를 틀어놓았다. 아무일도 할수 없게 만들었던 긴 하루, 온몸을 두드려 맞은것 같은 통증으로, 괴롭지만 미친듯이 실시간 뉴스를 쫒았던 기억이 있다. 수학여행을 갈때마다 용돈때문에, 옷때문에 실랭이를 벌였던 딸을 떠올려 봤을때, 그렇게 보내서 더 애틋했던 집떠나는 새끼에 대한 내 기억 속에서, 당시 그 참사는 이 나라 모든 부모들에게 형벌이었다. 팽목항에 자원봉사를 갔다. 충격적이고 비통했던 것은 세월호 유가족 텐트앞에는 치워줄 음식물 쓰레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어서, 입에 넣지 않아, 일상 쓰레기가 저렇게 깨끗하구나...가슴을 쳤다. 이글을 적는것도 여전히 힘들다. 세월호 학번 어린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기성세대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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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였죠. 아마 등교하고 오전에 반 친구들과 함께 다같이 교실에 있던 컴퓨터를 하다가 알게되었을겁니다. 처음에는 모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께서도 사고에 대해 말씀해주셨고, 매 쉬는시간마다 사이트에 들어가 실시간 정보를 보았습니다. 초반에는 구조자 수가 늘어갔지만, 어느순간부터는 주춤하더니 희생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조자수는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죠. 마지막 에어포켓 희망이 사라지기 전에 구조에 들어가길 바랬습니다.지금도 관련 글을 보면 내가 그 상황인걸 상상해봅니다. 배에 갇혔을때의 공포감,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함, 배에 갇힘 사람이 구조되길 바라는 간절함,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절망감... 이러한 감정들에 공감하려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말할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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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입구역에 살고 있었다. 그 날은 수업도 없고 해서, 방에서 리포트를 적고 있었다. 잠시 기분전환한다고 웹서핑하고 있는데, 배사고 기사가 속보로 났다. 바로 티비프로그램 접속했는데 믿기지가 않더라. 해군출신이어서, 배사고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사람들보단 더 알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중요하게 배우는 게 배침몰시 "이함"하는 방법인데, 침몰할 게 뻔한 상황에서 왜 도대체 왜 이함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근해라, 구명조끼 찬 상태에서 이함만 제대로 했더라면, 거의 대부분 정말 어쩌면 수백명 모든 사람들이 생존했을텐데...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가 솟구쳤다. 리포트고 뭐고 접어두고 몇시간 동안 내 방 책상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고통과 무서움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 날의 내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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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이었던 그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남자친구와 점심을 먹고있었습니다. 오전에 간단히 소식을 들었지만 전원구출이라는 얘길 듣고 가볍게 넘겼었는데, 아니더군요. 결국 밥도 다 못먹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울면서 수업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뒤에 근처에 세워진 분향소에서 노란 리본 달아놓고 혼자 울다가 왔었어요. 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때 그 기분, 상황 모두가 영화처럼 머릿속에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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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을 보던 고시를 접고 다른 길을 모색하던, 석사 마지막 학기였습니다. 여느때처럼 학교에 오고, 수업 없던 친구와 동원관에서 밥을 먹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전원 구조"라는 소리에 별거 아닐 거라며, 저녁에 술이나 먹자며 농담하며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고... 랩탑을 켜고 습관처럼 다음과 네이버를 돌다가 별안간 굳어버렸습니다. 오보였다니. 어디서 느껴지는 지 모를 한기, 4월의 몸서리에 휴게실로 나가 TV를 켜고, 신문사 홈페이지를 뒤지고.. 며칠간은 잠도 제대로 못잤던 것 같아요. 뭔가 새로운 소식이 나올까 하며. 가라않지 않은 희망을 기대하며. 봄날의 기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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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사고가 났지만 전원구조됐다는 오보를 듣고 그간 여러번의 대형사고를 경험하면서 우리사회가 이제 그정도 시스템은 갖추어졌나보다 안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간 식당에서... 그사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고 충격과 안타까움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tv 화면 속 완전히 뒤집어진 세월호를 지켜보던 그때 그 장소와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오후 내내 일은 손에 안잡히고 너무도 적은 구조자수, 늘어가는 사망자수, 심지어 계속 바뀌는 탑승인원... 숫자들을 지켜보며 안도는 당혹감과 공포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부끄러움과 원망으로 바뀌었죠. 구할 수도 있었던 황금같은 시간, 기회들을 다 흘려보내고, 꽃같은 아이들을 허망하게 그렇게 보냈다는 것,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도 세월호 세글자, 노란리본을 보면 코끝이 시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