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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외국 발령으로 나가신 담당 상무가 업무차 회사와서 점심을 먹는 날이었다. TV에서는 속보로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고 "아이고""라는 말한마디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없이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전원 구출이 라는 기사가 나왔다. 다행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그 땐 지나가는 이야기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떠난 동생 생각이 나서 더이상 뉴스를 볼수 없었다.. 사실 현실회피였다. 그리고 미안함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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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저는 중학교 3학년 이었고 아직 기억나는게 학교에서 고맙게도 뉴스랑 연결을 시켜주어 각교실에 있는 TV로 뉴스를 시청하며 옆 칠판에 생존자 와 실종자 명 수 를 적으며 모두 돌아오길 기원했고 이동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TV를 틀어 생존자 수가 늘어나 있는걸 보며 좋아하며 박수치던게 기억납니다.. 또 사망자 수가 늘어나면서 TV를 안틀게 되고 그러다가 잠깐식 보면 안좋은 뉴스들만 나오고 ... 또 그 이후 친구들과 뜻을모아 remember 20140416 팔찌와 노란리본 벳지를 친구들과 나누고 했던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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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같이 취업준비학교에서 컴터를 배웠어요 원래오전에 회계를 배웠어야햇는데 회계선생님이 일이잇어서 오후로 바꼈엇죠그래서 컴터 수업하는데 알고있는 내용이라 옆의 같이 배우는 아주머니를 알려주면서 인터넷을 하고있엇어요세월호침몰이라는 기사를 보고 아주머니랑 어떻게 하냐며 안타까워햇고 다구했다는 기사를 보고 다행이라고 했고 오보라고해서 생방송으로 방송하는걸 봤어요전 지금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2년이지낫는데도 불구하구요 너무나 충격적이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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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다른 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사람의 파도에 떠밀려 출근을 하고, 업무의 광풍에 잠시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동료들에게서 배가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자주가는 포털에서 간단히 기사를 보았지만 이미 구조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위치나 기후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역량으론 빠른 수습이 예상되는 상황.이런 생각이 정리되며 다시 업무에 파고들었습니다.하지만 퇴근 전 확인 한 상황은 이해 할 수 없는 기록들과 이야기들 뿐....말도 안되는 상황과 어처구니 없는 대처는 내가 살아간 2014년의 하루가 너무나 낯설게 드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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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요ᆢᆢTV앞을 떠나지 않고 보고있었던ᆢ배가 기울어 침몰하는 순간까지 설마 그많은 아이들을 구하지 못할꺼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무슨대책이 있겠지 믿고만 있었어요ᆞᆞ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ᆞᆞ왜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을 못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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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마을 해안가 지방에서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날씨가 좋았고, 짬을 내어 본 인터넷 기사를 보고는 "큰 배고, 날씨도 좋고하니 금방 다 질서정연하게 구조되겠구나."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수업과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을 다 구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오후에 보고 당황스러웠다. 근무를 마치고 오후 5시쯤 학교 밖을 나서서 마을길을 걷는데, 포근한 공기와 맑은 하늘 저너머에 옅게 퍼져나가던 연보라 연분홍의 노을의 색조까지 기억이난다. 이 바닷가마을에서 1년간 사택생활하며 근무하면서, 환절기철의 이 바닷가 동네의 날씨에 바람도 이렇게 잔잔하며 포근하고 쾌청한 날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서, 날씨가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러했기에 이토록 따뜻하고 맑고 바람잔잔했던 그 좋은 날에, 그런 큰 배의 승객구조에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믿어지지 않아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한민국이 이정도였나 생각했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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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여느때와 다름 없이 공부를 하고 그 다음주에 나가게 될 실습을 준비하던 중, 핸드폰 뉴스를 통해 보게 된 그날의 아픔...처음엔 잘 구조되겠지 큰 일 없겠지하며 그저 스쳐지나갔는데...그것이 잊지 못할 아픔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주변 소식...머리는 하얗게 되어버리고 안산에 사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했던 것들이 기억에 남네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고 내 일이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만 생각했던 그 시간의 부끄러움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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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둘째 아이 출산이 얼마 남지않아산후 조리 도우미 서비스를 신청하려고동네 보건소에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어요.아침에 나오면서 세월호 사고가 났다고 티비에서봤고, 버스 타고 가던 중에는 전원 구조 성공이라고 들어서.. 솔직히 큰 사고는 아닐거라고 생각했죠.그러던중 타고 가던 버스가 다른차와 살짝 부딪히는 사고까지나서 세월호 사고는 생각에서 멀어졌어요.그리고 보건소에서 일을보고 첫째 아이 어린이집에 들을 일이 있어서 가는 중 그때 알았습니다. 전원 구소 성공은 오보였고, 배가 가라앉고 있다구요.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큰 배가 사람들을, 그 꽃같은 아이들을 품고 망망대해로 가라 앉고 있다는게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정말 끔찍했습니다. 사고를 당한게 내 아이도 아닌데 어쩜 그리 슬프던지.. 정말 생각만해도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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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휴대폰으로 사고 내용을 보고전원 구조 뉴스를 보고별생각없이 점심 일을 끝내고쉬는시간에 뉴스를 보고 경악했습니다.이뿐만 아니라초등학생이었던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때도성수대교 붕괴사고 때도 다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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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기억하겠습니다!2014년 4월 16일...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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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억한다. 미술 학원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어 버스를 타고 폰을 만지작 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라디오가 들려왔다. 세월호의 침몰 소식이었다. 그때 뉴스를 보는 순간 눈에서 왠지모를 눈물이 흘렀다. 이상했다. 왜이럴까. 그때의 난 이 사태의 결말을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한것일까. 이유 모를 눈물을 뒤로 하고 난, 교회로 달렸다. 교회로, 그리고 들어갔다. 4층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내가 믿어온 내가 바라온 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했다. 저들을 구해달라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당신의 자녀들을 구해달라고....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어 뉴스를 확인했을때 눈에 처음 들어온 글자는"전원 구출 "기적이었다. 내가 기도한 신이 마침내 보여 주셨구나.다음 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정류장에서 꺼내 본 뉴스를 확인한 나는 몸에 힘이 풀렸다.기적은 없었다. 그렇게 7시간은 흘러갔다.난 그날을 기억한다, 기적은 없었던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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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장 처음 가본 도시 에서 미팅 후 갑자기 추워지고 눈이 내려 감기에 걸려서 다음 미팅이 힘들었고 내가 기침을 많이하자 바이어가 박하 사탕을 줬다.나는 연속 5-6팀과 하루종일 세 군데 도시에서 미팅이 있었다. 동료는 다음 도시로 국내선 이동중 짐가방을 분실했고 옷가지를 사기위해 한밤중 월마트를 찾아갔다. 출장을 다닌 이례 가장 정신 없는 여정 중에 로밍을 한 동료가 한국에 배가 침몰해서 난리 났다고 했다. 엥?? 배가 잠기면 무슨수를 써서라도 탈출, 구출해야하는거 아닌가? 한국에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난 그 후 그동안 관심없던 인터넷 뉴스를 매일 보게 되었다.너무도 특별한 날 더 많은 것들 모두 기억합니다.기억이 안나신다고요??? 최면 치료가 필요하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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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며 보았던 뉴스는 모두가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이상하게도 점심을 먹으며 보았던 뉴스는 구조자와 실종자를 나누었고, 어느덧 사망자의 이름을 전해주었다기억나는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일식 카레와 고로케, 시덥잖은 이야기 그리고 차가운 무심함아직 그날의 점심이 잊혀지지 않는다아니 잊지 않는다죽음이 가득한 바다와도 같은 마음의 서늘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그렇게 우리가 만든 차가운 죽음들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을 살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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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수요일지방에서 패스트푸드점 매니저를 하고 있던 저는 그때 서울로 4박5일간 교육을 받으러 갔엇습니다.아침에 정신없이 일어나서 준비하고9시에 수업을 시작했는데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어머어머를 외치더니강사님이 지금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고 해서 뉴스로 확인했던게 기억이 납니다.전원 구조라는 뉴스속보가 떴을때는진심으로 모두가 기뻐했었는데그게 오보였고, 잘못된 것이었스빈다.금요일에 수료과정이 끝나고모두가 즐거워해야했지만우리는 그럴수 없었습니다.저는 그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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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소식을 듣고 믿지 못했습니다. TV를 틀자 배가 가라앉고 있는 영상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그 영상 위에는 숫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저의 마음도 착잡함을 넘어서 불안해져만 갔습니다. 적어도 약간의 조치가 취해지고도 남을 시간이 흘러도 그만한 조치 조차 취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전원 구출이라는 문장이 이어졌습니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하지만 그게 거짓이었다고 아는 순간 그저 분노만 치밀었습니다. 선장과 대통령은 한동안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고 피해받은 학생분들을 보며 우리는 씁쓸해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조금씩 사람들에게 잊혀져갔습니다. 평범한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된건지 며칠 후 일부를 제외한 많은 언론들은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잊을 때마다 상기시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 그리고 우리의 손에는 노란 리본이 쥐어져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잊지 않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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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살고, 안산에서 일했던 그 4월 16일.출근을 하고 평소처럼 일을 보던 그 오전 시간, 이사님이 큰일이라며 뉴스를 열어보기를 종용했다.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연 뉴스창에는 "단원고"의 아이들이 탄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전원구조"의 속보가 떠올랐다. 안도했다.하지만, 만나던 사람의 연락이 왔다."준형이가 연락이 되지 않아. 세월호에 있는데..."그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그 사람이 가르치던 아이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 또한 생생하게 떠올랐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두어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원구조"의 속보가 오보였음이 밝혀졌다.점심 시간, 끼니를 때우고 뉴스를 다시 보았다. 어디에도 그 아이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퇴근시간을 즈음할 때 까지, 그 아이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퇴근 후 밤 열 한시, 만나던 사람과 만나 부둥켜안고 울었다.일곱 시간이 아니라, 하루의 기억이 온전히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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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뉴스를 처음 침대에서 휴대폰으로 접했다. 잠결에 그저 해외 토픽처럼, 자고 일어나면 바로 잊혀질 헤프닝으로 생각했다.내가 틀렸다.방송을 보느라 자는 것도 잊고 슬픔과, 절박함과, 기다림과 그리고 희망의 감정 등으로 복잡해진 기억이 난다.희망은 점점 소망이 되었고 소망은 절망이 되었다가 죄책감이 되었다가혹은 분노가 되기도 했다.감정이 켜켜이 쌓여 눌러붙은그 기억이 아직 내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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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교직원 식당에 수많은 교수와 교직원들은 모두 숟가락을 들고 멍하니 뉴스를 쳐다보고 있습니다.이윽고 누군가 어떡해 어떡해...라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는 다른 학교로 이직하신 여교수님들은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습니다. 미혼이었지만 저역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우측에 숫자가 바뀌기를 바라고만 있었습니다. 현실같지 않던 상황...화면 우측의 숫자는 바뀌지 않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안산에 추모하러 갔을때 줄서서 운동장을 뱅뱅 돌면서 마치.. 석탑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 마냥 그 수많은 사람들은 경건하게 현실을 직시했습니다.드디어 그 사진속의 얼굴들을 대면했을때 터져나오는 슬픔은.. 내 가족과 친지마냥 미안하고 서글프고... 그날은 전국민의 마음이 다친 날이었습니다. 그 상처가 어찌나 깊게 파였던지.. 그 뉴스의 순간, 그 운동장의 내 발걸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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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두달 잎둔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지상파 채널을 한없이 돌리며 뉴스를 봤습니다.태내에서 함께 들을 아이에게 괜찮을 거라고 다 구할 수 있을거라고 속삭이며하루 종일 뉴스 만 보고있었습니다.입맛도 없고 티비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아 늦은 점심은 김치말이 국수 저녁은 배달음식을 먹으며 훌쩍이며 뉴스만 본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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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시험기간이었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고 그 4월 16일에는 오전 수업이 없어 느지막히 일어난 참이었다. 그 때의 시야가 내겐 아직 선명하다. 그 자취방의 풍경. 아이들은 똑바로 앉아서도 보았을 그 아침의 옆으로 누운 방. 나는 왼쪽 얼굴을 베개에 대고 모로 누운 채 충전기에 연결해둔 핸드폰을 습관적으로 켜서 네이버 메인을 봤다. 여객선이 침몰했지만 300여명을 전원 구조했다고 했다. 그 기사를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구조되었다니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나 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비행기처럼 사고나면 바로 죽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당연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굉장히 순진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쯤은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뭐? 아이들이 아직 배 안에 있다고? 수업 중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 말씀이 지루했었을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던 그 순간의 감각을 나는 기억한다. 전원 구조란 오보를 접했던 그날 아침을 나는 기억한다. 아직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숨겨져있던 그 때, 나는 기사들을 찾아다니며 읽었고 친구들과 가슴아픈 마음를 나누었고 학교 커뮤니티에 세월호에 관한, 그렇지만 아직 조회수가 높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기사를 퍼갔었고, 토론했고, 그리고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우리는 평범했다. 숨긴 사실들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서 죽어간 아이들도 구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다같이 우리였다.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을, 그러나 말하지 않는 당신들이 기억 못하는 7시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감히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얕은 말로 더는 속이지 마세요.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억들로 당신들이 잊어버린 기억들을 반드시 되살려 아이들 앞에 끌어낼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당신들도 곧,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