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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을 기억하고 추모 하겠습니다청소년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간 그날 오늘도 비가 오네여 청소년들을 추모 합니다https://youtu.be/pOW6rbKMsoE추모영상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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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부모님과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있는 날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세월호를 타고 단원고 수학여행을 간 학생 언니 오빠 선생님들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라는 뉴스와 그 선장이었던 해양경찰부 관련된 사람들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내용과 함꼐 나왔습니다 그 7시간동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고 세월호 추모영상을 볼때마다 마음에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014.04.16 잊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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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4월16일 저는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초등학교1학년때 기억이라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않지만 아마 세월호 소식을 듣고 어렸던터라 배가 침몰했다는거를 잘 모르고 그냥 이런일이 있었구나 대충 이렇게 생각했죠 그날엔 세월호 희생자분들이었던 언니들,오빠들,선생님들,선원분들,일반인 승객분들이 그 큰배 안에서 점점 배가 기울어 공포감을 느끼고 살려고 발버둥을 치시고 마지막 침몰하기전까지 구조요청을 했지만 해경들은 구하지못했죠 그 많은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배안에 있는 사람 한명도 살려내지 못한 해경들한테도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선장도 자기만 살겠다고 승객들을 배안에서 가만히있으라고하고 자기 혼자 탈출하고 얼마나 무책임한겁니까 ...침몰했을때 희생자분들이 얼마나 춥고 무섭고 살고싶었을까 이 생각만하면 마음이 찢기는거 같고 미어집니다...선장이 승객분들께 바다로 뛰어내려야한다고 대피해야한다고 이 말만 했어도 전원구조가능할수도 있었고 이렇게까지 많은분들이 희생하는 일은 없었을수도 있습니다 진짜 다 살수도 있었는데라는 생각때문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벌써 희생자분들이 하늘나라에 간지 7주기가 되는해입니다 4.16만 되면 희생자분들의 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줄줄 나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하고 그 차가운바다안에서 희생하게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대형침몰사고가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희생자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나라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희생자분들의 희생 절대 잊지않겠습니다 2014.04.16 그날 희생자분들의 희생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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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학생과 그등등분들에게 미안합니다 차가운 바다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빨리 구조못해줘서 많이 미안해 미안합니다 그리고 탈출하라고 방송을 해야하는데 가만히 있으세요 해서 미안해 미안합니다나도 어쩔수가 없었어배선장이고 뭐고가 우리먼저 도망가자해서 난 일을해야겠고 말을 안들으면 뭐라고 할것같아서 방송을 그렇게 해버렸어 나도 차라리 같이 하늘에 갔으면 좋았을텐데.. 너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해서 살아도 사는게 아니야 유가족들 여러분들 에게 미안합니다 반성하면서 살겠습니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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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근무중이었고 테레비에 침몰과 관련된 뉴스가 나왔는데 전원구조라고 했습니다. 국가가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판단과 무능력에 의해 이렇게 될수 있구나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이런 모습보려고 대한민국에 그 동안 세금내고 한건지 실망감들고 서운하고 신뢰감이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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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학교로 들어가는 길에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하는 도중 포털메인에서 뉴스를 접했다. 그때의 장면이 기억난다. 나는 5513인지 5511인지를 타고 왼쪽 창가에 앉아있었고 버스는 서울대 정문 앞 로터리를 들어서고있었다.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고 비현실성에 머리는 멍해졌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속보 사이사이에 속속들이 올라오는 슬픈 사연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먹먹한 슬픔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종일 심란하고 뒤숭숭했다. 하필 그날은 또 엄마의 생신이라 우리 가족은 한 파스타집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었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밥을 먹는 동안 티비속의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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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웹서핑 중, 전원 구조 속보를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기사 보니까 다 구조됐다더라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웃으면서 말했었다. 모두에게 정말 미안하다. 누군가가 바다 가운데서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다 구조됐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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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의경이었습니다. 근무를 갓다와 내무반 tv로 소식을 접했고 어떻게 저런 일이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네요. 이후 자대 내 외출 제한, 운동 금지 등 조치가 내려졌고 한 간부는 "지금 모든 공무원이 죄인의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 너희도 고생해 달라."고 하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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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미국에 있었어요 공부하며 다른 날과 다름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소식을 듣고 나서 페이스북 상주하면서 구조소식이 들리길 기다렸네요... 이렇게 큰 비극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어요 외국에서 듣는 조국의 비극적인 소식... 두렵고 모든 게 믿어지지 않고 꿈을 꾸나 싶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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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수업이 없어서 집에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속보를 먼저 보고 바로 TV를 켜서 계속 뉴스 중계를 봤어요. 전원중계 속보를 보고 다행이다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심각해지는 상황에 TV앞을 떠날수가 없었어요. 너무 믿기지가 않고 뉴스를 보면서도 현실인거같지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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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로 식당에 가서 티비를 보는데 큰 배가 침몰된 상태로 있었다. 내가 티비로 보고 있을 정도면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이고 벌건 대낮이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모두 다 쉽게 구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데 당연한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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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들었고, 일에 집중은 못한채 계속 뉴스만 새로고침 했어요. "전원구조"란 말에 다행이다 생각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산소를 넣는다 만다 소리가 있어서, 천안함 당시 해외에서 밤새 초조하게 기다렸던게 생각이 나며, "아마 정부가 산소를 넣는다고 하는건 거짓말 일거야. 그때처럼 또 넣지 않겠지" 생각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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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교사. 오전 중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 배가 가라앉았는데 다행히 모두 구조됐다더라"라고 얘기하고 그대로 수업함. 점심 시간 때도 선생님들하고 식사하면서 구조돼서 다행이다-라고 얘기했었는데 막상 오후 되니 그게 오보였고 엄청난 실종자 수... 그 이후부터는 계속 뉴스 새로고침.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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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최순실과 관련된 체육계의 재단 중 한 곳에 컨설팅을 가서 그 곳의 인사담당자와 점심을 먹다가 tv를 보았어요. 그곳의 인사담당자도 저도 우리가 최순실과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는데 ㅠㅠ 전원 구조된 것 듣고 다행이라면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나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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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군대를 들어가기 보름전이었고 어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뉴스로 속보를 보고있었습니다. 현실감 없는 속보에 일이 손에 잡힐리가 없었습니다. 외부와 차단되어있는 훈련소에 들어가서도 주말마다 세월호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던 나와 동기 훈련생도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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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보았던 속보는 YTN이었던 것 같다.전원 구조라고 떠있어서, 웬일로 일을 잘했네. 그정도 생각을 하고 지나갔었다.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뒷자리의 동료가 전원 구조는 오보라고, 배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고 구출작전을 진행하고 있다고 얘기했다.하수상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별일없겠지 무사히 다들 구출되겠지 했지만, 뉴스는 계속 참담해지기만 했다.지금 바라는 일이 딱 하나 있다면, 세월호 마지막 출항 전으로 돌리고 싶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인천항으로 달려가 출항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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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평가를 받고 식사를 하러갔다. 티비에서는 계속 속보가 뜨고 구출하는장면이 나왔다. 설마 한명도 더 안나올까싶었다. 당장 뛰어가 배앞부분에 구멍을 내고싶었다. 시간이지날수록 더 미칠꺼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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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원 나오기 전날이에요. 웅성웅성.. 무슨 일인가 했지요. 다른 아이들은, 사람들은 죽어 나오는데 저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 세상에 나간다니... 먹먹하고 두렵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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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교수회관에서 동료와 커피를 마셨다. 우리 아이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난 아이를 둔 그는 "눈물이 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아직 감정이 현실 파악 속도를 못 따라오는지 반응을 안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더니 그는 "부모가 되니 이런 일들이 전과 다르게 다가와요."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 아이가 그 배에 탔다"는 설정을 해 보기 시작했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한 단계 설정을 해야지만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건가 싶어서 참담했다. 동일본지진, 오슬로 테러 때에 현장에 있었다. 언론이 비극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 사고 또한 "타인의 고통"으로 인지해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 우려했다. 그날 귀가 후 생중계로 절망을 재확인했다. 몇 개월 후 새로 들어간 직장, 옆자리 동료가 세월호 잠수사였다. 그는 직접 캄캄한 물 속에서 죽은 아이들을 몇 명이나 끌어안고 나왔고 이후 트라우마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도 먼 곳에서도 그날의 사고를 목도한 사람들이 전방위적으로 그날의 충격에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도리어 "기억이 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워딩이다. 본 것을안 봤다고 해야 하고 아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야 하는 베드로들이 댓가를 치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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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아직 학부 졸업 전이었고, 아침 수업 발표가 있어서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금장 단추가 달린 얇은 카키색 자켓을 입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택시 라디오에서 진도 앞바다에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나왔고 아저씨는 볼륨을 키우시면서 "쯔쯧" 소리를 내셨다. 나는 놀라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찾아보았고 속보를 보며 전원구조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고, 라디오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해 다행이라고 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했다. 그리고 발표를 마친 뒤 점심을 먹고 폰으로 뉴스를 다시 보았는데 뭔가 이상했고, 그 뒤부터는 하루 종일 티비와 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 유독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