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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수업이 없어서 집에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속보를 먼저 보고 바로 TV를 켜서 계속 뉴스 중계를 봤어요. 전원중계 속보를 보고 다행이다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심각해지는 상황에 TV앞을 떠날수가 없었어요. 너무 믿기지가 않고 뉴스를 보면서도 현실인거같지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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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로 식당에 가서 티비를 보는데 큰 배가 침몰된 상태로 있었다. 내가 티비로 보고 있을 정도면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이고 벌건 대낮이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모두 다 쉽게 구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데 당연한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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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들었고, 일에 집중은 못한채 계속 뉴스만 새로고침 했어요. "전원구조"란 말에 다행이다 생각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산소를 넣는다 만다 소리가 있어서, 천안함 당시 해외에서 밤새 초조하게 기다렸던게 생각이 나며, "아마 정부가 산소를 넣는다고 하는건 거짓말 일거야. 그때처럼 또 넣지 않겠지" 생각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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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교사. 오전 중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 배가 가라앉았는데 다행히 모두 구조됐다더라"라고 얘기하고 그대로 수업함. 점심 시간 때도 선생님들하고 식사하면서 구조돼서 다행이다-라고 얘기했었는데 막상 오후 되니 그게 오보였고 엄청난 실종자 수... 그 이후부터는 계속 뉴스 새로고침.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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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최순실과 관련된 체육계의 재단 중 한 곳에 컨설팅을 가서 그 곳의 인사담당자와 점심을 먹다가 tv를 보았어요. 그곳의 인사담당자도 저도 우리가 최순실과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는데 ㅠㅠ 전원 구조된 것 듣고 다행이라면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나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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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군대를 들어가기 보름전이었고 어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뉴스로 속보를 보고있었습니다. 현실감 없는 속보에 일이 손에 잡힐리가 없었습니다. 외부와 차단되어있는 훈련소에 들어가서도 주말마다 세월호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던 나와 동기 훈련생도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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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보았던 속보는 YTN이었던 것 같다.전원 구조라고 떠있어서, 웬일로 일을 잘했네. 그정도 생각을 하고 지나갔었다.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뒷자리의 동료가 전원 구조는 오보라고, 배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고 구출작전을 진행하고 있다고 얘기했다.하수상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별일없겠지 무사히 다들 구출되겠지 했지만, 뉴스는 계속 참담해지기만 했다.지금 바라는 일이 딱 하나 있다면, 세월호 마지막 출항 전으로 돌리고 싶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인천항으로 달려가 출항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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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평가를 받고 식사를 하러갔다. 티비에서는 계속 속보가 뜨고 구출하는장면이 나왔다. 설마 한명도 더 안나올까싶었다. 당장 뛰어가 배앞부분에 구멍을 내고싶었다. 시간이지날수록 더 미칠꺼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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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원 나오기 전날이에요. 웅성웅성.. 무슨 일인가 했지요. 다른 아이들은, 사람들은 죽어 나오는데 저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 세상에 나간다니... 먹먹하고 두렵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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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교수회관에서 동료와 커피를 마셨다. 우리 아이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난 아이를 둔 그는 "눈물이 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아직 감정이 현실 파악 속도를 못 따라오는지 반응을 안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더니 그는 "부모가 되니 이런 일들이 전과 다르게 다가와요."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 아이가 그 배에 탔다"는 설정을 해 보기 시작했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한 단계 설정을 해야지만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건가 싶어서 참담했다. 동일본지진, 오슬로 테러 때에 현장에 있었다. 언론이 비극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 사고 또한 "타인의 고통"으로 인지해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 우려했다. 그날 귀가 후 생중계로 절망을 재확인했다. 몇 개월 후 새로 들어간 직장, 옆자리 동료가 세월호 잠수사였다. 그는 직접 캄캄한 물 속에서 죽은 아이들을 몇 명이나 끌어안고 나왔고 이후 트라우마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도 먼 곳에서도 그날의 사고를 목도한 사람들이 전방위적으로 그날의 충격에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도리어 "기억이 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워딩이다. 본 것을안 봤다고 해야 하고 아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야 하는 베드로들이 댓가를 치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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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아직 학부 졸업 전이었고, 아침 수업 발표가 있어서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금장 단추가 달린 얇은 카키색 자켓을 입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택시 라디오에서 진도 앞바다에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나왔고 아저씨는 볼륨을 키우시면서 "쯔쯧" 소리를 내셨다. 나는 놀라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찾아보았고 속보를 보며 전원구조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고, 라디오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해 다행이라고 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했다. 그리고 발표를 마친 뒤 점심을 먹고 폰으로 뉴스를 다시 보았는데 뭔가 이상했고, 그 뒤부터는 하루 종일 티비와 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 유독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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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입니다. 아침부터 계속 실험실에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저녁에 오피스로 돌아와보니 연구실 형이 알려줬습니다. 배가 뒤집혀서 학생들 구출하고 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헐 세상에.. 어떡해.. 빨리 인명피해 없이 다 구출되면 좋겠다. 구출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뉴스 찾아보기 전까지는요.뉴스 보고 너무나 충격먹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게되고 나서 가슴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그날은 더 구출이 되어야 돼 구출할 수 있을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가지고 싶었습니다..아마 안에 있던 아이들도 구명조끼 입고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들 들으며 "곧 구출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장면이 그려질 때마다 너무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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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인터넷을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학생회관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ytn과 인터넷으로 계속 소식을 들었다. 완전 구조 되었다고 했다가 몇몇이 구조되지 않았다고 했다가. 수시로 변해가던 구조 상황이 기억난다.언론도, 구조대도 일찍 사고를 발견했기에 쉽사리 구조하고 마무리 될거라 짐작하고 중앙전산원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과제를 마칠 즈음이면 사고도 일단락 되었을거라, 그렇게 생각했다.과제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며 인터넷을 다시금 뒤적였을 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다. 점심 때 보았던 그 많은 사람들과, 구조대와, 주변의 선박들은 무슨 일을 했길래. 어떻게 대응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참을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이 길어지다보니 밥을 넘기기 힘들었다.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감이 든다. 큰 일 아닌 사건사고로 넘어갔을 기억이, 미흡했던 대처로 큰 사건으로, 큰 사고로 기억에 깊이 남았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그 일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다. 당신들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같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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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오전에 기사를 보고큰프로젝트 티비를 틀고 볼륨도 키워 사무실직원들이 계속 보면서 일하고있었어요. 오전에 첫장면 보도 즈음엔 배가 많이 기울지도 않아보이고 다행히 거의 무사히 다 구조된다는 보도가 나와 다들 다행이라는 얘길 했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저 배주변에 구조의 손길이 왜이리 부족하냐???이런얘기도 하고 구조못하고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들 탄식 했었어요. 저와 함께 그 사무실에서 큰 화면을 보던 모든 동료들 다함께 그날을 기억하고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요 그리고 앞으로도 기억할겁니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학생들도 꼭 평생 기억할게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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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암벽등반 연습을 마치고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항상 속상한 일은 일단 혼자만 알고 티를 안내던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췌장암 투병중이시던 우리 할머니가 고통에 못이겨 섬망증세를 보이시며 당신의 엄마만 찾으셨다고... 엄마를 간신히 달래드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을 태운 배에 사고가 났고 구조중이라고했다. 한 학생의 할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표정을 가눌 수 없는 와중에 버스에서 내려 봉은사에 가 촛불을 두 개 켜고 함께 울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날의 일은 우리 할머니 생각, 사고발생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 라디오 속 할머니의 놀란 목소리가 뒤섞인 개인적인 슬픔이었지 설마 그토록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멍을 남기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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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이었어요. 오전 공부를 마치고 학원 1층에 있던 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먹으면서, 뉴스를 봤습니다. 여객선이 침몰했지만, 다 구조되었다고 하더군요. 항해사인 동생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전했어요. 오늘 배가 침몰한 모양인데, 별일 없는지. 동생은 여객선은 연안으로 다녀서 사고가 많이 나는 거고 자기가 타는 배는 안전하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다시 공부를 하다가 저녁먹으면서 뉴스를 다시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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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저는 휴학을 하고 모 은행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탕비실 앞 TV에서 기울어져가는 배와 "전원 구조"라는 자막을 본 기억이 생생하네요. 점심시간에도 모두 구조해서 다행이다, 즐거운 수학여행 망쳐서 어떡하냐 다른 직원분들과 이야기 했었는데... 나중에 그 뉴스가 오보라는 것을 알고 하염없이 인터넷 뉴스를 새로고침 했던 기억이 나네요. 생존자 수가 늘어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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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출근길 사내 버스에서 라디오로 처음 사고 소식 접했어요. 전 조선소에서 일하는데, 사고 소식을 듣는 순간 차창밖에는 거대한 배들이 지어지고 있었죠. 처음 소식에는 가라앉고 있으나 무사히 전원 구조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어요. 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배한척 만드는데 관련된 안전 룰이 몇개인데, 그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을일도 없고 가라앉는 수 시간동안 뭘해도 구하겠지 했거든요.근데 그러고 몇시간동안 회사일 하다가 잠깐 인터넷을 봤는데 말도안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어떻게 거기서 사람을 못구하고 있단거지? 그 이후에는 하루종일 기사만 봤어요. 뱃머리만 수면위에 있을때도 어떻게든 한명이라도 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일말의 희망도 무너졌을땐 그냥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어요. 그날의 기억 너무도 생생한데 또 그만큼 강하게 외면 하고 싶은 기억이었나봐요. 세월호 관련해서 조문을 갔을때 조차 진상규명에 관한 세세한 논쟁들을 일부러 더 외면하고 있었어요. 안타깝지만 관련함 의혹들이 말인안된다고 믿고 싶었어요. 그런 제가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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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중이었어요. 핸드폰에 뜬 세월호 침몰 기사를 보고 놀랐다가 곧 구출이라는 속보를 보고 다 구출됐대요 다행이다 하며 옆자리에 앉은 동료분과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곧이어 배 안에 아직 수백명의 사람이 있고, 배가 기울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그때 함께 발을 동동 굴렀던 옆 동료분의 얼굴과 표정이 생생합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은 오후였어요. 그날, 그다음날, 그리고 한참 지나서까지 그 시간들을 잊지 못했고... 1년 뒤에도, 2년 뒤에도 그날만 되면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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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합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기 위해 화장을 하다가 뉴스를 보았죠.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모두 구조가 되었다구요. 많이 놀랐겠다, 저기 있던 사람들 앞으로 배는 무서워서 못 타겠네, 그래도 다행이야, 하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엔 모든 게 달라져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보고 받은 이후 무얼 하였나요. 나처럼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나요. 그날 내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던 내가. 그런데 당신은 한 번이라도, 죄책감까진 바라지도 않을테니, 책임감이라도 느껴본 적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