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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는 사무실 이사 다음날이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여직원이 집에 단원고 다니는 사람 있냐고 묻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고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세월호 관련 내용이 속속 올라왔습니다.....그 때 든 생각은 설마 먼 일 있을까?? 설령 잘못되더라도 몇명정도 위험할수는 있겠다 생각했고 다시 일에 몰두 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쉬고 있을때 한 직원이 전원구조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저는 오 대박~~ 대한민국 왠일 살아있네 하면서 안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오보였고 사태의 심각성을 나중에 깨달은 저는 절망속으로 빠졌었습니다.....저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한동안 마니 괴로웠습니다..... 참사당일 아이들이 아파하고 죽어가는동안 전 바쁘다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안산에 20년 넘게 살았으면서 단원고가 어디있는지도 몰랐고 그런이름의 학교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참사당일 제 태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합동분향소, 단원고 아이들 교실, 안산하늘공원을 시간이 날때마다 찾아갔었고.....세월호 참사집회도 참가했었습니다....그리고 2년이 넘게 흐른 지금.....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번 시국을 통해서 다시한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늘 미안하고 미안합니다.....정말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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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종례를 하려던 참 선생님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곧 눈물을 글썽거리시고 저와 제 친구들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 체 하교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이 되어 퇴근 하신 엄마와 티비를 보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들 역시 원래였다면 모두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계셨겠지요. 세월호에 타고 있던 분들 중에서도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뜻하지 않은 "사건"을 겪게 되어 저의 부모님을 비롯한 자식을 두신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는 크게 놀라셨고 슬픔을 감출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저희 엄마 역시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편인데도 놀람과 슬픔이 역력한 표정이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잊지않을 것입니다. 그 분들이 보고싶습니다. 살면서 큰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그 분들이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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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까봐, 엄마와 같이 뉴스 보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두려워서, 고작 눈물이 두려웠기에 뉴스는 하루가 지나서야 봤고 모두가 구조되지 않았기에 눈물을 더 흘렸다. 몇년이 지나건 7시간이 밝혀지고 인양이 된 후에도 우리들은 기억하고 노란리본을 가슴에 품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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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접한 시간은 학교 쉬는시간이었습니다. 친구가 페이스북을 보다가 수학여행, 여러가지 이유로 제주도에 가던 사람들이 탄 배가 넘어졌다는 기사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곧 전원 구조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구조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 기억하고있습니다. 그날을 잊는다는게 상상이 안갑니다. 당신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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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때 고등학생 삼학년이였고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졋고 우리 모두는 걱정햇지만 금방 구해졋다 구햇다라는 기사가 떠 모두들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다 오보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슬프고 기다리기 힘들었는데 그들은 7시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요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할수가없엇고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희생된사람들은 무슨 잘못이 있다고...그 아이들과 희생된사람들이 잘못한게 있다하면 이 나라에서 태어난것 밖에 없을것입니다 우리는 알 권리가 있고 진실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영원히 기억할거며 잊지않을것입니다 이 일을 묻지 마십시오 묻으려할수록 우리는 더 파낼것입니다 숨기지마십시오 숨긴다고 모를 우리가 아닙니다 국민들이 주체인 이 나라에서 숨긴다고 숨길수 있을거라 생각합니까? 우리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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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는 학교에 있어서 핸드폰을 못해가지고 엄마 일 도와드리면서 SNS 하다가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집도 아니여서 거기에 있는 티비로 뉴스를 보고 또 인터넷에 있는 기사들을 확인했던거 같습니다. 그러고 전원 구조 되었다고 해서 너무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구조자보다 사망지가.더 많더라구요 그거 보고 계속 울었던게 기억이 나네요... 아직까지도 너무 속상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요 몇 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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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이들중 학교에서 내가 먼저 기사를 보고 다급하게 애들한테 얘기해주고 그 이후로 수시로 상황이 어떻게 되가나 확인하다가 전원구조됐단 기사을 보고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를 하면서 친구들과 열심히 놀고 수업받고있는데 그게 오보였다고..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아이들인데 왜 이렇게 내 가슴이 답답한건지.. 그날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집에가서 멍하니 티비뉴스만 바라보다가 속이 너무 안좋아서 방에 들어가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 구조 안된 어린양들이 매우 많다고.. 가슴이 미어터지고 하루종일 무언가에 집중이 안됐어요 미안했어요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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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컴퓨터시간에 자유시간이여서 인터넷을 하다가 세월호침몰 기사를 접했는데 심각한 일인줄 모르고 그냥 껐던 기억이 납니다 후에 매우 심각하고 안타까운 일임을 알았고 나와 나이가 같던 친구들이 수학여행가다가 그런 끔찍한 일울 당했다는게 너무 안타까웠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기억납니다 지금도 생각만하면 눈물이 나는데 절대 2014.04.16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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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고삼 중간고사 기간이였는데 다 뒤로 한체 뉴스만 봤던 그때 .. 기억할게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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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당연히 구조 될 줄 알았어2시간, 똑같은 뉴스만 반복했어3시간, 거짓된 뉴스만을 반복했어...7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7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7시간 혹시라도 살아있을 생명을 위해나라는 아무것도 못 해줬고나도 아무것도 못 해줬어..미안해언니 내가 너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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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울면서 너희를 구해달라고 기도했다.티비 속의 숫자가 바뀔 때마다 마음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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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이전정부는 무엇을 했는가재계과 유착하여 안전을 값싸게 판매하고작은 정부란 명목으로 중요한 안전망을 축소했다4월 16일 당일정부는 무엇을 했는가해경은 미숙했고,, 대통령은 행방이 묘연했다최악의 구조 작업으로 많은 생명을 놓쳤다. 한명이라도, 단 한명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텐데.4월 16일 이후이 정권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진상규명 요구에 가증스레 침묵하였다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유가족의 아픔을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차고 슬픈 것이 바다 유리 아래로 어리었다어두운 파란 하늘에는 300개의 별이 떴다모두 사랑하고 사죄하고 가슴아파하라진실을 인양하라. 우리는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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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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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와 동갑인 친구들의 불미스러운 소식에 학교는 난리가 났고 선생님들은 일단 공부하고 있으라고 하시며 분위기를 가라앉히셨다. 그러다가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학교 티비로 뉴스를 틀어주셔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다. 내 친구들이나 마찬가지인 18살 아이들이 그렇게 수능도 보지 못한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난 아직도 필통에 노란리본을 달고 다닌다. 그 친구들을 위해. 잊지 않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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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이 침몰하는데 전부다 구했다고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론 통제였고... 아직도 그배에는 여러사람이 갖혀있다고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날하루.. 일하지만 재맘은 팽목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무슨죄라고.. 미안하다 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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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세월호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건 학교 가는 셔틀 안이었어요.. 라디오에서 당시 사고 소식이 들렸죠.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탄 배에 사고가 났지만 잘 구조되었다는 소식 말이예요. 사고가 난 건 정말 안타깝지만 구조라도 잘 되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가 달라졌어요. 가만히 있으라던 방송 내용, 아이들을 바다에 내버려둔 채 혼자 멀쩡히 살아나온 배의 선장, 구조를 제지당했다던 민간 잠수부의 증언...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죠. 몇백 명의 어린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게, 그게 어떤 비리 때문이었다는 게, 해경이, 국가가 그들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 구조하지 못하게 했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2년 반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하나둘씩 늘어나는 사망자 명단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고 친구랑 주고받은 카톡 내용도 또렷이 기억나요. 친구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친구는, 자기 목숨을 내놓더라도 아이들을 구하러 갔을 거라고 했어요. 혼자 멀쩡히 살아나온 세월호 선장을 보면서, 너무 치욕스럽지 않냐며 자기는 죽더라도 자기가 믿는 명예로움을 지킬 것이라구요.하지만 알고 보니 문제는 선장 개인의 이기심만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고 소식과 쏟아져나오는 온갖 의혹들에 한동안 정말 무기력해졌어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는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광화문 광장에는 노란 리본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고, 팽목항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었죠. 당시 유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이어나갔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는지, 경찰이 어떻게 그곳을 찾은 국민들을 막아섰는지... 정부에서 발표하는 내용과 현장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직접 전해주는 소식 사이의 괴리감도 절망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그런데 이젠 점점 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당시 일어난 일들이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일을 기억하는 한, 2014년 4월의 일이 잊혀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사람들이 그날의 일을 기억해 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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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었고 논문쓰는 중이었습니다. 지쳐서 무기력하게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식당 대형티비에서 전원구조가 됐다는 자막을 봤어요. 다 구조됐구나하고 관심을 끄고 다른 일들을 했죠. 그리고 서너시간 후에 우연히 다시 휴대폰을 켰는데 오보였다고..그때부터.황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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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2때의 일이였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 소식을 선생님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었다. " 전원구출 " 이라는 소식을 본 우리들은 잠시 안심했지만, 오보라는 소식을 다시 볼 수 있었다...인양을 하네 마네, 다이빙벨이 어떻다,..나는 어떤 기사도 믿지 못했다. 여론을 조작하는 기사들로 넘쳐나고, 그와중에 유가족들 앞에서 라면을 먹고잇는 높은 사람도 있었다.내가 정말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유가족들의 간절한 외침과 침통한 곡소리였을 뿐..해양경찰부는 수사를 통제했다.세월호 안에서 살려달라 문을 두드리던 친구들을 무시했다. 다이빙벨 근처를 돌며, 민간인 잠수부들의 구출 작업또한 방해했다.나는 절대 그날을 잊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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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에나와 밥을먹는데티비에서 속보가나오더라고요그냥 배가침몰하고 전원구조됐다고나와서그런가보다하고 다시도서관들어갔는데저녁때나와서 다시보고 충격받았었어요그날 날씨도기억나고 분위기도 기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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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아직도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장거리 통학생인 저는 그 날 아침에 자체휴강을 고민하며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패션관련 교양을 들으러 학교에 나갔습니다. 1부 강의를 듣고 쉬는 시간, 강의실은 술렁거렸습니다. 세월호가 침몰 되었다는 뉴스...우리도 교수님도 불안해했지만 강의는 계속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점심시간, 세월호 승객들이 전원구출 되었답니다. 다행입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공강의를 들으러 갔습니다. 모든 강의가 끝난 귀가길, 아까의 전원 구출이 오보랍니다. 심장이 철렁 합니다. 집에가는 2시간 내내 모든 뉴스를 뒤졌지만, 책임자는 보이지않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사흘,나흘...여전히 책임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뉴스에 단원고 학생들이 보일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십니다. 그 뒤로 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책임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 프로필사진은 노란 리본입니다. 2년전의 그 날 후 한번도 바뀐적이 없습니다. 보면서 항상 그 날의 금요일을 떠올리려 노력합니다. 제 프사가 바뀌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