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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군인으로 휴가 복귀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집에서 복귀전 TV뉴스를 보다가 세월호 사건을 처음 접하였고 그런 상황을 실제로 본 것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구조 중이니 탑승객 모두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조자 명단만 보며 상황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늘어날 것만 같았던 구조자 수와 반대로 중간중간 나오는 정부의 어이없는 뒷북 대처와 총체적 부실로 늘어나는 사망자 수만 보며 복귀하는 버스로 올라탔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복귀중 지금 이 상황으로 부대 분위기가 무겁진 않을까 생활 하는데 어려움이 있진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문득 하였고... 부대 생활을 하면서도 뉴스를 통해 상황을 접하였지만 내 생활 하는데 급급하여 한번더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것 같습니다.지금이라도 이런 기회가 있게되어 고맙고 잊지않고 앞으로도 항상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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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침몰했다는 뉴스...그리고 전원구조...그리고 오보...이런 무기력한 재앙같은 뉴스는 처음이었다.초기대응실패...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는 수많은 의혹들...이젠 독하게 용서없이 낱낱히 밝혀야한다.누구도 그러지 못하게...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단 하나의 의혹도 남지 않을때까지 잊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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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가 고3이었다는 것도, 봄이었다는 것도,전원 구조라며 그제서야 안심하시던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와, 나중에는 "세월호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줄줄이 취소되던 크고 작은 행사들, 기사 하나가 더 나올 때마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지고 슬퍼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티비로 보며 엉엉 울던 나날들, 공부하려 자리에 앉았어도 살고 싶어서 처절히 기도했을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생각하며 자꾸 눈물만 흘리던 날들을 기억한다. 사고가 일어난 주의 주말은 부활절이었다. 부활은 원래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인데. 부활 성가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눈물이 젖어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 시기만큼 내 모든 진심을 담아 그렇게 처절히 기도해본 기억이 없다. 매일 밤을 묵주와 함께 했고 그렇게 슬펐던 기억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고 후 지금까지 유가족들이 얼마나 차가운 현실과 외면이 부딪혀왔는지에 대해서는 함께 슬퍼해주지 못했다. 꽃같던 우리 친구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슬픔까지 이제 나는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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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가면서 사고 소식을 봤습니다.작은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를 먹으며 작은 TV를 통해 배가 반쯤 가라앉고 있는걸 봤어요.대낮에. 온국민이 생중계로 보고 있는데 별일 있겠어?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잠시 후 전원 구출됐다는 속보를 보았고. 함께 있던 지인에게 "것봐, 별 일 없잖아" 라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그리고는 더이상 보지 않았어요.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가라 앉았다는 뉴스를. 그리고 이제까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라앉는 동안 저는 "별일 아니잖아"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그래서 너무 죄송합니다.그래서 기억하려 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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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아이들과 같은 나이 딸아이가 있습니다. 4월 16일 일주일 후 쯤 딸아이도 제주도로 수학여행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침몰해 가는 현장을 생중계로 바라보며 이렇게 무능할수가 있는지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이게 진정 나라입니까.어찌 꽃같은 아이들을 그렇게 보낼수가 있습니까.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세월호 말만 들어도 노란색만 봐도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밝혀야합니다.왜 그랬는지누가 그랬는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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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그 기억은 출근길에 차 속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안심했던 소식이었습니다. "전원이 구조되었다" 모두가 구조되었으니 다행이다 하며 출근했고 얼마 후 그 소식은 오보였음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물에 잠긴 배 속에서 나오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죠. 그 무력함이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포로 다가왔죠.어쩌면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한 생명들이 나일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그리고 그 것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이. 그게 어쩌면 나일수도 있었다는 것을.내가 아니어서 안심할 수 없었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력해서 미안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힘이 될 수 있게 곁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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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람에 나른해지는 4월 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 된지 시간이 꽤 흘렀고 우리는 여느 날 처럼 각자의 삶을 바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 부리나케 택시에 올라 등교하며 보았던 그 길에 사람들은 유달리 평화로워 보였다. 택시기사의 짜증섞인 한숨 소리와 함께 들려온 속보.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기울어졌다." "구조중이다." 수업시작까지 5분 남짓한 촉박한 시간에 사고속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었다.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구조 되었다고 했다.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랬으면 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 했으니까. 모두 안전하게 다치지 않고 구조되어 별일 아니었다는 듯 다시 친구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밤새 웃고 장난치고 떠들어야 했다. 다시 집으로..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로 둘도없는 형제로 돌아가야 했다. 강의가 끝난 후 교실 밖 TV화면에선 배가 반쯤 잠긴채 가라앉고 있었다. 오보였다. 그날, 우리의 7시간은 아이들과 함께였다. 무너지고 무너져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켜봤다. 그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미안함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건. 우리 모두가 기적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비가오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제발...제발...기적이 일어나길 바랬다. 그 곳에 있진 않았지만 모두가 밤새 뉴스 속보를 틀어놓고 희망의 소식이 들리길 기다렸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고 형제였다. 유가족들의 절규와 몇 안되는 구조된 아이들의 울음소리... 충격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담아내려는 기자들의 셔터 소리.. 그 사이를 허둥지둥 왔다갔다 하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급박하고 정신없는 육지상황과 대비되게 바다는 조용히 빠르게 배를 집어삼켰다. 미동도 않는 배의 끝머리가 완전히 잠겼을 때... 그때... 아이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은 멈췄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누가.. 누가 감히 잊었다 하는가.. 아직도 숨이 턱 막히도록 믿겨지지 않는 그날의 시간들이 이렇게 아픈데 누가... 그 어느 누구가 그만 잊자고 하는가.. 그날, 아이들은 국민들의 가슴에 묻혔다. 지금 쯤 이면 대학가 어딘가에서 친구들과 술한잔 기울이며 아름다운 청춘을 꿈꾸고 살아갔을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을 이 세상에 두고 먼저 떠난 선생님.. 부모님의 자랑스런 딸이었던 한 사람.. 누구보다 국가는 이 참사를 잊혀질 때마다 잊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기억이 나지 앉는다"가 아니라 "기억하려 애쓰겠다"여야 한다. 진실은 완전히 묻히지 않는다 잠시.. 가리워져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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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딸의 생일이었어요. 평소와 똑같이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에 뉴스를 보는데 배가 뒤집어졌다고...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안도했는데... 그날 식당 메뉴도 다 기억이 나는데...몇시간 뒤 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심란해서 일도 잘 안됐지요.어린 딸에게 생일 축하해란 말도 미안할 정도로... 우린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네요..미안하다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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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다름없는 주말이었습니다.뉴스속보"세월호 침몰..단원고 학생 전원구조"사상자없이 모두 구조됐구나..싶었습니다.그 이후..오도..오도..또 오도..정말 뉴스 왜 하나..개 욕이란 욕은 다했습니다.. 지긋하고 정떨어져안봤습니다.. 그때는 싱글이라 그저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도 잊혀져 가고있었습니다..세월호 2주년 되었을때 몰랐습니다..벌써 그렇게 흘렀나.. 저는 결혼을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습니다..다시금 되새겨보게됩니다..정말 정말 정말 못 구한것이아니라 구하지 않으려 한 닭대가리,개같은정부..이 모든걸 조정한 강남아줌마..잊지맙시다..그리고 싸웁시다..우리의 후세 그 후세에도 일깨워줍시다..같이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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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 처럼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간단히 뉴스기사를 훑어보고 "전원구조"라는 제목에 안심한 후, 사무실에 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점심때 쯤 팀장님이 아직 배에 아이들이 있다고 하길래 무슨 말씀이시냐고, 아침에 제가 기사 봤다고,, 했지요그러고 나서 나오는 기사들은 정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안타깝고 가서 구하고 싶고,, 그런 날들이 몇 주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날은 2014년 4월 16일이었고 그 느낌, 아픔, 다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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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복권방에 들어서는데 TV에선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종일 바빴던터라 인터넷기사도 핸드폰 검색도 찾아볼 틈이 없었던 하루였습니다. 화면하단에 표시된 뉴스속보를 보고는 요동쳤던 심장의 떨림을 잊을 수 없습니다. 퇴근버스에서 기사를 검색하며 울컥했던 순간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그 무력했던 시간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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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업무상 중국 상해로 출장 중이었으며,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지나가는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객선이 침몰되었고, 200명 이상이 구출되었다는 보도였습니다. 그 후 실종자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숫자가 뒤집히고 대부분이 아직 배 안에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일이 손에 안잡혀서 중간중간 뉴스를 찾아보고 검색해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네요.왜?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학생들을 버리고 탈출했을까요?왜? 해군의 통영함 출동을 막았을까요? 왜? 어떤 노숙자를 유병언의 시체로 둔갑시켜서 사건을 억지로 마무리했을까요?왜?왜?왜?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거라고 믿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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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자다 일어나 티비를 켰는데 배가 옆으로 기울고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영화인가 이게 뭐지? 라는 생각으로 지켜봤습니다. 자막이 나오고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걸 알았습니다. 저게 지금 사고라고? 근데 왜 구조하는 배는 안보여? 사람은 다 어디갔어?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는 계속 기울고 어느순간 자막으로 전원구조가 나오자 숨죽이고 보다 내쉬었던 한숨 그리곤 우리나라 해경 대단하네 다행이네 우리나라 멋지네 읊조렸는데 그러면서 화면엔 안보이던데 그 많은 사람은 배튀편에서 구했나 다행이다 하고 있는데 자막으로 오류라고 나왔을땐 정말 이 글을쓰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어느순간 유가족을 야당에 서게하더니 정치싸움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람들도 지켜워한다는 기사들이 쏟아지며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리고 자꾸 저를 몰아가는 사람들 틈에 외면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유권자로써 잘 뽑았으면 잘 지켜보았으면 이렇게까지 되지않았을텐데 단원고 학생뿐만아니라 거기에 같이 계셨던 많은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비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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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처음 봤던 그 바다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있었지만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7시간동안 그렇게 되어가고있는 걸 모두는 알고있었다.7시간이 지나고 바다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우리는 촛불로 바다를 다시 녹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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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이게 뭔일이야?설마 구조되겠지..구조될거야..어떻게..라는 말을 반복하면.."전원구조"라는 속보에 안도의 한숨..그리고 오보 수정기사..그 날의 감정..생생히 기억합니다.그이후의 무력감 생생히 어제처럼 기억합니다.고속도로에서 보인 팽목항 시신 영구차량에..마음이 어둠으로 가라앉고..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그 시간을 왜 기억해야할 분들은 기억을 못하시는지..정말 자기 자식 아니면 상관없다고..눈 감을 수 있는지 묻고싶습니다.우리 이웃의 자녀들이..무기력하게바다에 수장되다 싶이...죽어버렸는데..우리 사회는 왜 서둘러 감추려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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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7시간은?세월호 참사가 나던날. . . 그날 난 집에서 7시45분에나와서 10번 버스를 타고동암역에 8시10분 사무실 도착.업무준비하고 10시에 여직원xx와 부천 테크노파크에 가서 상담하고11시45분쯤 테크노파크에서 식사중에 세월호 뉴스를 보아으며 2시까지 차에서 쉬면서 뉴스를 보다가 다시일하였고 오후4시30분에 사무실로 출발하여 5시10분에 사무실 도착후 업무 마감하고 6시쯤 퇴근하여 집에 6시30분 도착후 다시 뉴스를 보면서집사람과 딸에게 안전에 대한 애기를 하였다.난 지금도 기억 하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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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를 접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당연히 빨리 구조되겠지.해경도 도착했다고 하고,조업중이던 어선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모두 구조되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겠지... 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그런데....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고,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아,몇날 몇일 TV앞에서눈물만 흘렸습니다.그날의 기억...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우리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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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있을 때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인터넷을 하던 중 속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한 배사고라고 생각해서였는지 그 속보를 흘긋 보고는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나온 전원구조속보를 보곤 "다행이다"라는 짧은 생각만을 남기고는 다시 한번 속보를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속보는 오보로 밝혀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일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도 커다란 배가 물 속으로 완전히 침몰해버리는 장면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흘려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그 때 그 뉴스에 더 관심을 갖었었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들을 위해 기도했었더라면, 그들이 돌아왔을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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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수요일) 11시 30분부터 급식.학교급식실에서 점심급식을 하던 중, 뉴스를 통해 인천발 제주도행 세월호의 선박사고와 함께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급식실내에 설치된 대형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다른 교사들과 안도의 말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마쳤습니다.한편, 월요일(2014년 4월 14일, 월) 저녁에 사두었던 스케치북.50대 중반의 나이에 스케치를 배우고 싶어 문방구에서 B4용지만한 스케치북과 4B 연필도 두 자루 샀습니다. 화요일(4월 15일) 저녁은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어서 개봉을 못하고 수요일 (4월 16일)방과후부터 저희 학교의 미술선생님께 도움을 받아 그리기연습을 하기로 미술선생님과 약속했습니다. 오후 수업, 교무실안에서는 세월호침몰사고에 관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참담한 뉴스만이 TV를 도배했습니다. 그리고 교무실 나의 책상 귀퉁이에 놓여있던 스케치북은 책상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차마 그림그리는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문제의 7시간,"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도 찾기가 힘든가요?""배에 갇혀서요""예... ...... 그날의 스케치북은 지금까지도 비닐커버에 갇혀 저의 책상밑에 가만히 놓여있습니다. 개봉도 하지 못한 그 스케치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연습한다)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오만으로, 죄스럽운 생각이 아직까지도 듭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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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생 아이를둔 부모입니다.내자식과 같은 애들이 라 종일 뉴스에서 눈을뗄수가 없었습니다..전원구조보며 당연하지 그럼 요즘세상에,이러면서 안심도하고,, 다시뜬 오보소식에 직원모두가 일을제데로 할수가없었네요,,모두 한마음으로 걱정했더랬지요,, 어찌 그날을 잊을수가 있을까요 ㅠ ㅠ 저녁엔 고2였던 딸과 그저 어떡해어떡해 하며 눈물만 흘렸네요,, 아직도 세월호 생각만하면 이리도 아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