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업무상 중국 상해로 출장 중이었으며,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지나가는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객선이 침몰되었고, 200명 이상이 구출되었다는 보도였습니다. 그 후 실종자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숫자가 뒤집히고 대부분이 아직 배 안에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일이 손에 안잡혀서 중간중간 뉴스를 찾아보고 검색해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네요.왜?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학생들을 버리고 탈출했을까요?왜? 해군의 통영함 출동을 막았을까요? 왜? 어떤 노숙자를 유병언의 시체로 둔갑시켜서 사건을 억지로 마무리했을까요?왜?왜?왜?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거라고 믿고있습니다.
-
늦잠을 자다 일어나 티비를 켰는데 배가 옆으로 기울고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영화인가 이게 뭐지? 라는 생각으로 지켜봤습니다. 자막이 나오고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걸 알았습니다. 저게 지금 사고라고? 근데 왜 구조하는 배는 안보여? 사람은 다 어디갔어?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는 계속 기울고 어느순간 자막으로 전원구조가 나오자 숨죽이고 보다 내쉬었던 한숨 그리곤 우리나라 해경 대단하네 다행이네 우리나라 멋지네 읊조렸는데 그러면서 화면엔 안보이던데 그 많은 사람은 배튀편에서 구했나 다행이다 하고 있는데 자막으로 오류라고 나왔을땐 정말 이 글을쓰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어느순간 유가족을 야당에 서게하더니 정치싸움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람들도 지켜워한다는 기사들이 쏟아지며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리고 자꾸 저를 몰아가는 사람들 틈에 외면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유권자로써 잘 뽑았으면 잘 지켜보았으면 이렇게까지 되지않았을텐데 단원고 학생뿐만아니라 거기에 같이 계셨던 많은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비탄합니다.
-
TV에서 처음 봤던 그 바다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있었지만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7시간동안 그렇게 되어가고있는 걸 모두는 알고있었다.7시간이 지나고 바다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우리는 촛불로 바다를 다시 녹이려한다.
-
아니..이게 뭔일이야?설마 구조되겠지..구조될거야..어떻게..라는 말을 반복하면.."전원구조"라는 속보에 안도의 한숨..그리고 오보 수정기사..그 날의 감정..생생히 기억합니다.그이후의 무력감 생생히 어제처럼 기억합니다.고속도로에서 보인 팽목항 시신 영구차량에..마음이 어둠으로 가라앉고..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그 시간을 왜 기억해야할 분들은 기억을 못하시는지..정말 자기 자식 아니면 상관없다고..눈 감을 수 있는지 묻고싶습니다.우리 이웃의 자녀들이..무기력하게바다에 수장되다 싶이...죽어버렸는데..우리 사회는 왜 서둘러 감추려하는 겁니까?
-
여러분의 7시간은?세월호 참사가 나던날. . . 그날 난 집에서 7시45분에나와서 10번 버스를 타고동암역에 8시10분 사무실 도착.업무준비하고 10시에 여직원xx와 부천 테크노파크에 가서 상담하고11시45분쯤 테크노파크에서 식사중에 세월호 뉴스를 보아으며 2시까지 차에서 쉬면서 뉴스를 보다가 다시일하였고 오후4시30분에 사무실로 출발하여 5시10분에 사무실 도착후 업무 마감하고 6시쯤 퇴근하여 집에 6시30분 도착후 다시 뉴스를 보면서집사람과 딸에게 안전에 대한 애기를 하였다.난 지금도 기억 하는데. . .
-
속보를 접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당연히 빨리 구조되겠지.해경도 도착했다고 하고,조업중이던 어선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모두 구조되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겠지... 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그런데....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고,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아,몇날 몇일 TV앞에서눈물만 흘렸습니다.그날의 기억...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우리의 분노!
-
그 때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있을 때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인터넷을 하던 중 속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한 배사고라고 생각해서였는지 그 속보를 흘긋 보고는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나온 전원구조속보를 보곤 "다행이다"라는 짧은 생각만을 남기고는 다시 한번 속보를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속보는 오보로 밝혀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일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도 커다란 배가 물 속으로 완전히 침몰해버리는 장면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흘려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그 때 그 뉴스에 더 관심을 갖었었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들을 위해 기도했었더라면, 그들이 돌아왔을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
2014년 4월 16일(수요일) 11시 30분부터 급식.학교급식실에서 점심급식을 하던 중, 뉴스를 통해 인천발 제주도행 세월호의 선박사고와 함께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급식실내에 설치된 대형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다른 교사들과 안도의 말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마쳤습니다.한편, 월요일(2014년 4월 14일, 월) 저녁에 사두었던 스케치북.50대 중반의 나이에 스케치를 배우고 싶어 문방구에서 B4용지만한 스케치북과 4B 연필도 두 자루 샀습니다. 화요일(4월 15일) 저녁은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어서 개봉을 못하고 수요일 (4월 16일)방과후부터 저희 학교의 미술선생님께 도움을 받아 그리기연습을 하기로 미술선생님과 약속했습니다. 오후 수업, 교무실안에서는 세월호침몰사고에 관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참담한 뉴스만이 TV를 도배했습니다. 그리고 교무실 나의 책상 귀퉁이에 놓여있던 스케치북은 책상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차마 그림그리는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문제의 7시간,"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도 찾기가 힘든가요?""배에 갇혀서요""예... ...... 그날의 스케치북은 지금까지도 비닐커버에 갇혀 저의 책상밑에 가만히 놓여있습니다. 개봉도 하지 못한 그 스케치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연습한다)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오만으로, 죄스럽운 생각이 아직까지도 듭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97년생 아이를둔 부모입니다.내자식과 같은 애들이 라 종일 뉴스에서 눈을뗄수가 없었습니다..전원구조보며 당연하지 그럼 요즘세상에,이러면서 안심도하고,, 다시뜬 오보소식에 직원모두가 일을제데로 할수가없었네요,,모두 한마음으로 걱정했더랬지요,, 어찌 그날을 잊을수가 있을까요 ㅠ ㅠ 저녁엔 고2였던 딸과 그저 어떡해어떡해 하며 눈물만 흘렸네요,, 아직도 세월호 생각만하면 이리도 아픈데...
-
14개월된 아들이 고열 증세로 입원했던 병실에서 처음 티비로 소식을 접했습니다.전원구출에 안도했던 것도 잠시, 400명 가까이 갇혀있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나네요.위증자들,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무책임한 것들은 (그들이 부르짖는대로) 법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2014년 4월16일 저는 그날을 기억합니다첫아이를 품에안고 버스에 앉아 선박사고와 전원구조라는 뉴스를보던 나를 기억합니다" 전원구조.." 요즘세상이 어떤세상인데 당연한결과라 믿고 뉴스를 닫으며 버스에서 내린기억을 생생합니다몇시간후 다시본 뉴스에는 너무나도 가혹했었습니다 무책임하게 우리의 아이들이 차가운물속에 잠기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고있어야하는..내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그 안타까운 시간을 어떻게 잊을수있을까요??
-
그 날은 제 생일 하루 전날 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갈 생각에 하루종일 들떠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되었고 정말 심장이 쿵 할 정도로 놀랐고, 걱정했으나 곧 모두 구출되었다는 뉴스를 보고서는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거짓 보도인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분노했습니다.
-
10시쯤인가 일을하고있는데 여객선 한 척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주위 동료분들에게 처음들었습니다. 그 여객선이 세월호였죠. 그리고 쉬는 시간에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그땐 전원 구조햇다는 오보가 나오고있어서 같이 일하는 분들이랑 "저렇게 큰 배가 침몰햇는데 벌써 다 구했데" 라면서 대단하다며 이야기를 햇고 그런가보다 하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게 오보라고 나오면서 일반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평생 아파할 유가족분들....그런데 나라는....그리고 예전에 국민 한 명의 목숨도 지키지못하면 그게 대통령 이냐 라던 대통령님은... 묻고 싶네요.. 당신이 대통령이십니까?
-
병원에서 근무하다 인터넷상 뉴스를 보고 의국내 TV를 켰고 기우뚱한채 가라앉고있는 큰 여객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헬기에 타고 상황보고를 하며 시시각각 몇도 기울어져있다고 생중계 뉴스를 하던 기자를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배에 갇혀있는데 왜 구조는 안하고 저리 중계만 하고 있는거지?? 저게 진짜 실제상황인가...제 눈을 의심하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배가 순간 훅 가라앉은것도 아니고 몇시간을 아이들의 죽음을 생중계하고 ..... 그걸 보고있는 내가슴도 찢어지는데 , 그걸 보고있을 부모들은 그 순간이 1초가 지옥아니었을까요?그날이 기억안나신다구요?저는 그날 뭘했는지 생생히 기억납니다.
-
전원구조... 오보...가 기억납니다.그 7시간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에어포켓이 있기를 바라며, "에어포켓은 고압일텐데"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
그날.. 수학여행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되었다는 소식.. 전원 구출되었다는안도감.. 오보라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너무 맘이 아파 일이 손에 안잡히고안타까워하던 그 무거운 공기를 기억합니다.지금까지도 세월호 말만 들어도 괜히 미안해지고 맘이 아픈데.. 아들이 고1때라그 안타까움이 더 가슴아프게 다가왔습니다.한동안은 세월호 뉴스를 일부러 멀리 했습니다..
-
2014년 4월 16일 학교에서 수업 중 이였습니다. 선생님 몰래 다들 폰을 안내고 몰래 핸드폰을 하는 와중에 세월호 기사를 봤습니다. 같은 지역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제 친구들의 동생, 저의 오빠의 스승, 제 후배들의 친구들 모두가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전원구조라는 말을 듣고 다들 다행이다라는 말을 하며 다음교시 수업을 준비하고있었습니다. 그때 까지는 정말 다들 구조되었다고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친구들의 동생들과 선생님들이 아직 배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 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나오는걸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입을 막고 울었습니다. 그날의 기억 뿐만이 아닌 그 날 이후의 일들 모두 기억합니다 장례식장을 찾던 친구들 동생을 발견했다면서 뛰쳐나가던 친구와 선생님의 뒷모습 모두 기억합니다. 일주일 전에 무얼 먹었는지 뭘 했는지는 기억은 안나지만 2014년 4월16일 아주 똑똑히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이 미웠던 그날 모두가 기억하는 그날을 왜 기억을 못하는 걸까요.
-
동인고등학교 3학년 6반 교실에서악동뮤지션의 인공잔디라는 노래를 듣다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그때 노래가사가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졌습니다."나도 숨쉬고 싶어 "라고 할때 정말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이런일이 다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출근 길 배가 침몰 됐다는 기사를 보고 "곧 구조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다른 기사로 눈을 금방 돌렸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곧 전원구출이라는 기사가 뜨길래 "역시 금방 다 구출 됐구나" 생각하고 업무를 보던 중 오보였다는 기사와 함께 승객 구출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제 자신을 책망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저 배안에서 어서 구조 되어야 할텐데 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점점 가망은 희박해 졌지만, 아니야 곧 생존자가 나올거야.. 나올거야.. 하루종일 뉴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날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그 날 저희 인근 동네의 학교 학생들이 그 배에 타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릿 했습니다.. 전원구조라는 오보는 그런 마음을 잠시 달랬지만 몇 분 후 다시 뜬 속보에는 오보라고 나왔습니다. 속보에만 집중 했던 저로썬 희망이 사라지는 듯 하였습니다. 제가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했습니다.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그리고 전 꼭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