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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학교폭력으로 인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라는 고통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인터넷을 켠 순간 이 날의 사건을 보았다 전원구조라는 오보와 함께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신없이 인터넷을 서핑했을까 잠시뒤 나는 물속에서 소리없이 아스라이 죽어간 이들을 보게 되었다"전원구조 라면서..? 아이들이 왜 죽어..?"그 순간 나는 엄청난 분노와 함께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한 국가에 증오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는 일개 사람임을 느꼈다 나 스스로도 학교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이런 나자신이 아직까지 부끄럽고 그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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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하고 취업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던거 같아. 나는 무엇을 할수 있을까 수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그런 아주 평범한 날이었어. 그 평범함에 너의의 소식은 믿을수가 없었는데 현실이라는 것에 말문이 막히더구나.미안하다. 너희도 이런 평범함과 소소함을 느낄수 있었을텐데 그 길을 막은것만 같아 마음이프구나. 절대 잊지 않을게. 영원히 잊지 않을게. 사라진 그 시간의 진실을 밝혀서 너희가 조금은 덜 아팠으면 좋겠다.절대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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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를 다니며 인디밴드에서 노래를 한다. 2014년 4월16일 수요일은 매주 수요일마다 우리밴드에서 정기적으로 기획공연을 하던 날이였다. 오전에 출근을 해 조금일찍 도착한 탓에 회사 1층 이디아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디아 천장에 비스듬히 달아운 텔레비전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화면에선 배가 침몰하고 있었고 전원구조 되었다는 자막이 보였다. 점원에게 무슨일이냐 물었고 점원은 수학여행 간 아이들이 탄 배가 침몰한것 같다고 대답했다. 구조가 되었다는 자막은 찜찜했지만 오보일꺼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창 오전업무로 바빠서 점심시간이되어 페이스북을 열은 순간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후 멤버들과 상의끝에 당일공연 및 무기한 활동을 하지않는다는 글을 올리고 그저 마음 무겁게 상황을 지켜보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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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에 나는 가깝고도 먼 일본에서 둘째를 낳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었다 친정은 한국 시집은 멀고 남편은 일이 바쁘기에 혼자서 매일 아둥 바둥 이였지만 그 날은 첫 애를 보면서 태어난지 한 달 된 둘째를 안고 마음 조리며 뉴스를 봤었다고향이 제주고 오빠가 해경이라 텔레비에서 더 눈을 뗄수가 없었다오보인줄 모르고 그래도 사상자가 적다는 안도감에 오빠만을 걱정했던 나다정직하고 바르고 강인한 오빠가 처음으로 우리가족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그 날 이후 였다많은 사람들 처럼 생을 달리한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족도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 가족의 눈물의 반은그 애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는 오빠의 눈물을 보며 같이 흘리는 눈물이였다그 7시간 동안 나는 어린 두 아이들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리며 희생자와 오빠의 안위를 걱정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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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출근하면서 사고 소식을 보았습니다.붐비는 서울 2호선 내에서 본 뉴스였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팀원들과 뉴스봤냐며 웅성웅성했죠. 곧 전원 구조 됐다는 소식에 안도했습니다. 안심하고 일하고 있던 중 얼마되지않아 옆자리 대리님이 깜짝놀라며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배 안에 아직 학생들과 사람들이 있다고..한동안 멍했지만 곧 구조 되겠지. 아까 뉴스에서 주변 바다에 미군함도 있다고 했었어..하며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동안 "말도 안돼 말도 안돼..."를 계속 되뇌었던거 같습니다. 너무 당연했던 구조 프로토콜은 없었고, 본질없이 유병언 쫓기에 급급했고, 희생자 유가족은 보상금 받았으니 그만 하라고들 압박당하고 빨갱이가 선동하고 있다고 오해받기 시작했죠. 저는 유가족의 마음을 감히 이해할수조차 없습니다. 어떻게들 견뎌내신 걸까요? 이번 시위현장에 등장한 고래 풍선 보면서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꼭 진실은 밝혀져야합니다! 박근혜를 비롯한 무능한 책임자들은 자국의 국민을 살리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국가의 수장이 국가적 재난 사태에 7시간동안이나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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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둘째가 태어나는 날이었습니다.병원 TV에서 세월호 침몰 소식과 함께 좀 있다 전원 구조란 뉴스를 보고 안심했던 그 순간이 떠오르네요. 그 사건 이후로 아이들과 관련된 사건/사고 뉴스는 볼 수 가 없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이 하염없이 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잊지 않겠습니다.가슴에 새기겠습니다.생떼같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우리 어른들이 값아야할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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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로의 여행 중이었고 낯선 호텔에서 갑자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습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제가 살던 제주가 지도로 보였습니다. 급하게 페이스북을 보았고 어느 누구 하나도 빠질 것 없이 아이들의 죽음을 걱정하였습니다.그 기억이 없다면 그게 그토록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핸드폰만 봐도 됩니다.구글 지도에 내가 그날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지도에 선명한 파란색으로 그어지며 표시가 됩니다.궁금하고 미심쩍은 사람들... 핸드폰만 보아도 됩니다.그 핸드폰에 다 남아있을 것입니다.물론 지웠을 테지만...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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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생각나요 제가 처음 접한 세월호사건은부끄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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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루종일 아이를 보느라 TV를 못봤습니다. 저녁에 시댁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배가 침몰했다는데 TV 봤냐." 뉴스를 보고 시댁어른들도 아이 생각이 나서 전화하신 게지요. 아이가 무서운걸 싫어해서 오늘은 TV 켜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그날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이 벌어진 줄 몰랐습니다. 그 날 이후 며칠을 TV보며 울었네요. 전에는 세상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른들을 원망했는데,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어 세상이 엉망이라고 누굴 탓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했습니다. 작년 4월 16일의 기억은 없습니다. 올해 4월 16일 기억도 안납니다. 하지만 2년전 그날은 너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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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외국어인 일본어 시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별명을 가지고 계신 일본어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전원 구조되었으니 신경 끄고 공부나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습했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나자 오보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의무적으로 핸드폰을 아침마다 걷어야 하는 학칙이 있었기 때문에 쉬는시간마다 컴퓨터를 켜서 실시간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상자는 매 쉬는시간마다 50명씩 늘어났고 석식시간에 결국 300명에 육박하는 사상자 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게 없었고 저는 모의고사를 풀었습니다. 교과서 복습을 해야만 했고 영어단어를 외워야만 했습니다. 300명의 우리같은 학생들이 죽어가는데, 수학공식을 정리해야만 하는 우리가 싫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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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에서 동생과 고기국수를 먹었어요 제주도를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아 고기국수가 그리웠거든요 맛은 생각보다 없었고 정면 위에 작은 테레비 안에 세월호가 침몰하는것이 보였어요 전원구조래요 아 다행이다 동생이 고기국수가 별로라고 말하면서 덧붙혔어요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고기국수 진짜 맛있거든요 아이들이 먹어봤으면 좋았을텐데 저도 배를 타고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밤바다 냄새도 좋고 배 움직이는 소리 파도소리 참 좋은데 그게 즐거웠고 고기국수가 맛있었다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이야기한것도 좋았는데 ...그런 당연한걸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너무 당연한데 그걸 악몽으로 만들고 배에 갇히고 무섭게 만들었어요 바다가 차가웠겠죠 평생 세월이란 단어와 노란리본을 가슴에 묻고 살게요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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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었던 나는 어김없이 친구와 함께웃으며 등교 중이었고 학교에 도착하니 친구들은 어떡하냐며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 중에 눈물 많은 몇몇 친구들은 눈이 벌게진 채로 울먹울먹 거리고 있었다. 난리통인 교실로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고 애들은 모두구조되었으니 걱정말고 괜히 우리가 더난리법석 떨지말라며 안심 아닌 안심을 시키고 출석을 부르고 나가셨다. 친구들은 서로다행이다 하며 그 후 수업시간에 열중했다.하지만 하교하면서 그 뉴스는 오보였다는것을 알게되었고 늘어나는 사망자수를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의 사고처리 태도 또한 마찬가지로. 나는 모르는척하는 어른들이 싫었고 억울하게 죽은 언니오빠들을 위해, 생자식을 잃어 대성통곡하는부모님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없어 매우 슬펐다.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부는나몰라라 하고 있었고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사람은 그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했는지사건의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 중 몇몇은 아직도노란리본 타령을 하냐며 말같지도 않은소리를 해댔다. 몇년 살지도 않은 어린 내가처음으로 이 나라에서 살고싶지 않다 이민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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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학번이었던 나는 새내기 기숙사생이었다.경기도권 학교여서 많은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세월호 소식을 듣고 몇몇은 사색이 되어 고향인 안산으로 돌아갔다. 내 동기 중에도 세월호에 탄 동생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다 기숙사 티비 앞에 모여 숨을 졸이고 답답해하고 부모님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울었다. 사상자 수가 늘어나는데 국가 원수는 나타나지 않음에 의아해했다. 배가 침몰하고 20살이었던 내가 봐도 큰 사고인데도 어리숙한 대처에 어이가 없고 허탈함과 분노를 느꼈다. 아직까지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20살 앳된 나이의 국민인 나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당신의 국민인 300명이 넘게 죽은 2014.04.16 . 그 때 당시의 7시간 조차 뭘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국가 최고권력자인 당신은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임이 충분하지 않은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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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학교를 방문하여 공연을 해주셨다. 전교생이 모여 웃고 즐기며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군인분들도, 선생님들도 다 즐거워하셨다. 친구와 나는 즐거워 어쩔 줄 몰라 소리를 지르고 같이 노래도 부르며 땀흘리며 춤도 췄다.그렇게 즐거웠던 공연이 끝나고 집에가서야 모두가 세월호 침몰을 알게되었다.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다음날 학교를 가보니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모든 선생님들께 전날의 즐거웠던 공연은 가장 슬프고 죄책감이 드는 공연이 되어있었다. 그 당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던 우리들도 2년반이 넘어서도 이렇게 큰 죄책감 안에서 살아가는데, 침몰소식을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목숨이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침몰 전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며 지금까지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당신은 살아있는 악마입니다.국민이 당신을 결국 이지기 못한다 하더라도 신은 반드시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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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전 날, 인생 최대치로 술을 마셔서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잠이 들었다. 알람 대용으로 쓰던 티비가 7시에 반짝 켜졌다. 뉴스에서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을 태운 배가 전복했다고 말했다. 내가 겨우 비몽사몽 일어났을 때 뉴스에선 전원구조라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아, 다행이다. 쟤들은 몇 년 뒤에 나처럼 술마시고 우리 수학여행때 그랬었지, 하고 이 얘기를 하겠지, 하면서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다시 일어났을 때, 내 머릿속에서 이 사고를 회상하며 동창들과 떠들던 아이들은 바닷속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아직 그 날을 잊지 못한다. 미친듯이 토해내서 불타는 것 같았던 속도, 아무렇지 않게 해프닝으로 회상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에 대한 자책감도 잊지 못한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7시간은 그렇게 쉽게 잊혀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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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수업을 끝내고 핸드폰을 집어든 나의 친구들은 모두 한 기사에 시선이 쏠렸다. "세월호 그렇게 큰 배가 쓰러졌다고?" 모두 믿을 수 없다며 너도나도 진실공방을 펼치기 바빴다. 우연히 안산 단원고에 친구를 둔 한 선배는 카톡을 하고 연락하게 바쁜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같은 학생이기에.....배에 반 이상이 보이는 사진이 든 뉴스를 처음 볼 때도, 전원 구조 라는 오보를 들었을 때에도, 우리는 모두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았고 울분을 토했다. 그 후 길거리로 나서 조금이라도 우리 언니 오빠들의 목숨이 헏되지 않게 행동하고 또 기억해내고 진실을 위해 나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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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눈물이 흘렀어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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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의 소풍 날이어서 김밥도시락을 만들던 중에 사고소식을 공중파 자막으로 접했습니다. 시간상 8시 전이었을 겁니다. 억울한 7시간 꼭 밝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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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같은 나이인 고2였다 영어듣기평가를 했던 날인데 쉬느시간에 짬짬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사고소식을 듣게되었다. 전원구조라는 뉴스캡쳐도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돌아와 다시 뉴스를 보았다. 분명 낮에 전원구조라는 기사를 봤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가더라. 며칠동안 건너건너 밤을 새며 여러사이트에서 진도앞바다 생중계를 해주는것을 보았다. 무슨장관인가가 왔었던 날도, 아이가 구조되었다 하여 신나게 달려갔는데 그게 거짓이었던 날도 나는 그자리에 함께 했었다.또 어떤때는 "지겹다"란 글을 쓴사람들과 싸우기도 했었다. 음모론 위선론자 평범한 고2는 안들어도 되었을 그런말도 들었었다. 그땐 많이 어려서 그런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무섭고 두려웠다. 나와 친구들이 욕먹는것을 보면서 울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의 욕따위에는 굴하지않는 성숙한 멘탈을 가졌을 뿐더러 그들은 다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유치하지만 내가, 내 믿음이 이겼다고 생각한다.나는 지금 대학생이 되었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고2에 머물러있다 평생이가도 그 친구들을 잊지못할 것 같다.그리고 믿는다. 내가, 우리가 기억하는한 진실은 밝혀질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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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해보자면 자대에 들어간지 3주정도 된 이등병, 자기 살기 바쁘느라 다른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시기 , 오전일과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에 틀어져있는 TV뉴스에 태어나서 처음보는 장면을 봤다. 커다란 배가 옆으로 누워있는. 아니 어쩌면 처음은 아닐지모르겠다. 옛날에 보았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장면이 연출되었었던것 같으니깐. 그래서인지 그 상황은 너무 현실감없었고 나는 하루하루를 눈치보기바쁘게 살아가는 이등병이었기에 그때는 그저 다른세상얘기구나 하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그러다가 며칠동안 뉴스에서 세월호얘기만 다루고 집에 전화했을때 가족들이 다 그얘기만 하는걸 듣고나서야 비로서 이게 큰일이었구나 하고 실감이났다. 지금에서야 그때의 감정을 남길수있게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는게 지금생각하면 그런 내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그때는 이등병으로서 마음의 여유가 그만큼 없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두서없이 써내려가는 이글은 정말 나의 의식의 흐름으로 끊지않고 써서 그렇지만 지금에서라도 이런프로젝트를 해줘서 고맙다. 나는 아니 우리는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