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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였습니다.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뉴스를 보며기울어가는 선체를 보며정말 세계 어디엔가 영웅이 있다면 구하러 와줘라왜 나는 그곳에 가서 그 배를 조금이라도 끌어내지 못했을까서울의 집까지 들어가는 시간 내내 제 자신의 무기력함을 거기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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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느때와 똑같이 고등학교 생활을 만끽하고 있을 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세월호 침몰"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기사를 눌렀다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언니 오빠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왠지 모르는 불안함, 안타까움으로 인해 집으로 뛰어가 티비를 켰습니다. 전원구출이라는 문구가 떴지만 이상했습니다. 영상에는 아무도 비춰지지 않았고 정확한 상황 설명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왜 나와 같은 고등학생들이 이런 일을 당했을까"사실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같은 고등학생 신분 아래 있으니 이 상황이 마음 아팠습니다. 꽃다운 나이. 18살. 저는 지나왔지만 여러분은 머물고 있네요.제 마음속에 품고 함께 가도 될까요?세상의 시간은 여러분을 잊고 흘러갈지 몰라도 제 마음속의 세월은 여러분을 품고 함께 가겠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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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소식을 접했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만 곧 모두 구출 되었다는 소식에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곧 오보임이 밝혀졌습니다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그날 오후에는 지도교수님과 면담이 있어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듣고 맛있는 케익을 받아나왔습니다 그날 제가 기억하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구분지어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참담한 일이라, 내 감정이 무너질까봐 일부러 귀를 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서워서 믿기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망각의 반댓말은 정의라고 합니다.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로 이끌어주리라 믿습니다.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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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출장을 가서 정신없던 하루였습니다. 구내식당에서 배식을 받으며 식당 티비로 소리없이 자막으로만 멀리서 처음 접한 뉴스에는 여객선 사고, 전원구조 가 선명하게 떠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느 작은 사고처럼 지나쳤습니다. 오보에 안심하고 지나쳐서 미안합니다. 진실을 꼭 밝혀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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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군인이었던 저는 오전 일과를 마치고 생활관에 들어가 TV를 보면서 이 사건을 알았습니다. 설마 저 안에 있는 사람을 다 구출 하겠지 라는 생각과 달리 무능한 정부는 수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 했습니다. 아직도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그 분들의 슬픔을 잃어본적 없는 사람들이 어찌 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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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바다에서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접하고조금 있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듣고안심했습니다.믿을 수밖에 없었죠.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들로부터 전해진 소식이었을테니깐요.분명 전원구조였는데사망자 인원이 늘고 뉴스는 갑자기 오락가락이고뭐지뭐지? 하고 있는 가운데 사망자가 느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거의 다 사망자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며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어이가 없고 대책에 화가나고 유가족들의 모습에 한없이 슬퍼졌습니다.지금은 분노합니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와 유가족들에게조차 오만하게 짝이 없는 그 국회의원들과 그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최고 통치자. 너무 화가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학생들과 희생자분들과 그 가족들에게..이런 나라를 만들어서, 이런 대통령을 뽑아서정말 너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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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친구들을 위해서 많은것을 해주지 못 미안합니다.제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촛불을 드는 것 뿐이네요광화문에 촛불하나 그것밖에 못해드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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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희 학교는 고3 수업 중에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단원고 학생들과 승객들의 사고를 처음 접했습니다. "정말 큰 일이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원 구조라는 보도에 안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큰 배에 탄 그 많은 사람들을 당연히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기만하는 오보였던 것이 드러나고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됐습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반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이 모두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 동생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국민들을 구하지 않았고. 국가가 차가운 바다에 국민들을 버렸습니다. 그 날이 그저 국민의 한 사람인 저도 이렇게 똑똑히, 생생히 기억나는데 대통령은 왜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겁니까. 세월호 사건의 슬픔이 아직도 이렇게 비통하게 가슴에 남아 있는데 국가 권력은 왜 진상규명을 막는 겁니까 세월호 사건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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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21개월 군 복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날을 기다려온 시간만큼 행복한 날이었다. 적어도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는.부모님께 당당한 모습으로 전역 신고를 하고 채 전투복을 벗기도 전에 비보가 전해져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안산"이란 단어가 들려와 멈춘 뉴스에서 난 시선을 뗄 수 없었다."지금 진도로 가야하나?", "가서 무엇을 도울 누 있을까?" 안절부절하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그저 저녁 늦게까지 전투복을 입은채 TV뉴스만을 바라보았다.얼마전 다시 찾은 광화문 광장, 그동안 애써 잊고 지냈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고, 나는 아직 전투복을 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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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글자를 써도 닿지 않음에 애통할뿐입니다.그동안 무지하고 무관심하여 죄송합니다.단원고 학생들과 일반 탑승객들,구조하다 돌아가신분들,살아돌아온 친구들, 남은 가족분들.이분들 모두 희생자 입니다.어느 한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셨을겁니다.수많은 의혹들이 풀려 그날이 더이상 아픈날로만 기억되지 않기를...그리고 그때 대한민국을 바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할수 있는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이제라도 너희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게.너희 가족분들도 일상으로 돌아가실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울게.구조하시다 돌아가신분들의 처우도 개선되도록 힘쓸거야.늦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게.남은건 우리에게 맡겨주고.지금이나마 편하게 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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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 학교에서 저는 한심하게 잠을 자고있었고, 아이들의 웅성웅성 소리에 깨어 세월호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였지만 전원 구조라는 사실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시 잠에 들었고... 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 전혀 다른 상황에 놀랐도 너무 안타까웠고 하염없이 눈물만 났습니다 .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잊지 않을 것 입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201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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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을 잊을 수 없는 건 그 날 제게 좋아하는.교수님 수업을 듣는 오전에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대학원생인 저는 당시 29살, 9시 반 수업 시작 후 사건발생 보도와 전원무사구조 보도를 보고 다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12시 반 수업이 끝나고 우왕좌왕하는 통에 이거 정말 왜 이러지 하며 당황했습니다. 밥을 먹고 과제 하다가 다시 뉴스보고 또 다시 보고 기자 친구들에게 연락해보고...외국에 있던 동생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는 그 날을 기억합니다. 특히 오전을 기억합니다.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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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다른 날들과 다를바 없이 출근해서 열심히 업무중이었는데 회사 서무 담당 언니가 공문을 받고 티비를 틀었어요.그 때 제 생각으로는 그냥 다들 구명조끼 챙겨 입고 해경 도움 받으면 무사히 구조되겠네 하며 별거 아닌걸로 생각했죠. 그러나 답답할 정도로 아무 움직임이 없는 정부를 보며 도대체 뭐하고있는지 평범한 25세의 어린 여성이 생각하기에도 한심해보였습니다.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면 모든 인력을 총 동원할수 있을텐데 ... 그리고 저는 출장을 나갔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는데 그 때는 오전에 봤던 배의 모습과는 조금 많이 달랐어요. 당연히 구출중이겠거니 했지만 선장은 이미 혼자 도망 나간 지 오래고, 함께 배를 탔던 시민이 아이들을 구하는 상황... 그리고 자발적으로 구하러 오셨던 인근 어민들.. 안에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이 갇혀있다는 걸 알고 물공포증이 있는 저로서는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더 소름끼치는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가는걸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거에요..... 그리고 그 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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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소식을 접하고 놀랐다가 전원 구조되었다고해서 안도하며 기뻐했다가 오보라는 사실을 다시 알고 절망에 빠졌던 그날의 그 상황 기분 감정 다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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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들 학교에서 현장학습 가던날 아침에 뉴스보고 소식을 들었었습니다.아침에 녹색 봉사후 지인과 약속이 있어서 준비하고 나가는 순간...전원 구조라는 자막을 보고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좀 홀가분한 기분으로 점심으로 보리밥을 먹고 돌아와서 보니 ㅜ 아침과는 완전 딴 세상이 되어버렸던 날 ㅜ이렇듯 생생하게 생각이 나는데 ㅜ도대체 왜...그랬는지 정확하게 밝혀 죄값을 치르게 해야겠지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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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 여름까지 군대에서 복무중이었고 취사병으로 근무했습니다. 4월 16일에 대해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새벽 근무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침 조리와 점심 조리를 합니다.점심 조리는 보통 아홉시부터 준비가 시작됩니다. 준비를 하려고 식당에 나갔을 때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던 군무원 분이 기억납니다. 뉴스에서는 진도 앞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속보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군무원 분에게 참 걱정이지만 곧 구조되지 않겠냐며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해 2월에 일어났던 리조트 붕괴사고를 떠올리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오며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그것이 잘못 보도된 내용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한시쯤 모든 일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뉴스를 틀었습니다. 뉴스 카메라가 담고 있는 장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새벽 근무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 사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서였는지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몇시간이 지나고 TV를 틀어도 상황은 낙관적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의 7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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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이틀째.어딜가나 교복입은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북적이던 제주. 멀리 마라도가 보이는 송악산을 올라가기전 제주행 여객선이 침몰중이라는 뉴스를 듣고 당연히 구조하겠지 생각하며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 다시 라디오를 트니 한두명 사망,전원구조 라는 소식에 안도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그리고 벌어진 끔찍한 현실...여행이고 뭐고 뉴스만을 지켜보며 경악했는던 그시간...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며 마주친 수학여행단 아이들의 침울한 모습들... 무섭고도 잔인했던,아프고 슬픈 그날 0416.지켜주지못해,구해주지못해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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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학교에서 부모연수가 있어 강당에 앉아있었습니다. 옆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아이친구 엄마가 "수학여행 가던 배가 뒤집혔대" "어머 어째"..."다 구조됐대"휴우 다행이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분들에 비할까마는 저는 그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됩니다. 너무 선명해서 더욱 사무칩니다.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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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취업 준비생이었습니다. 밤새 새로 뜬 구인 광고가 있는지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었죠.. 그날도 일과 시작으로 인터넷을 켰는데 세월호 참사 뉴스가 인터넷에 속보로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티비 뉴스를 켰습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반쯤 기울어져 침몰되고 있었고 그 이후부터 300명 넘는 사람들이 수장되어 가는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모두 가라 앉고 난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소름끼치는 감정들, 참담함, 안타까움, 죄책감, 무력감 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온몸이 떨리도 두려워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하루를...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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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제아네는그날신혼여행사이판에있었습니다한국에서그런끔찍한일이있었다는걸5일정도지난후에알았습니다....저희부부도신혼여행지로제주도를갈뻔했고그배를탓을수도있었습니다박근혜는 세월호당일 7시간 동안 뭘했는지국민앞에 실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