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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 한의원에서 근무중이었고대기실이랑 치료실 오고 가다가 자막으로 뉴스 처음 접하고YTN으로 돌렸어요.전원구조 오보를 보고 내심"와,, 진짜 다행이다" 했었구요.근데 조금 지나니까 집계오류라며 갑자기실종자가 늘어나고.. 이 집계도 확실치 않다고 하고..그 때부터는 정말 한동안 뉴스만 보고 살았던 것 같아요.이거 3년 가까이 되어가지만진짜 생생한 하루인데...잊지 않을겁니다.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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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아침에 보통 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갑자기 배가 침몰 됐다는 기사, 그리고 바로 나오는 전원구출....아!!다행이네..애들 다 구출됐네..ㅋㅋㅋ..그리고 저녁에 퇴근, 그리고 다시 접한 방송에서의 모습...잊을 수가 없는데...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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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지 보름된 둘째아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몸조리하고 있을 때였어요, 3살 첫째 아이도 함께 친정에 있었고요,친정부모님과 함께 TV를 보며 간식을 먹고있는데, 자막으로 사고소식을 봤어요.무슨 배가 뒤집어 졌다고 자막도 나오네,,했는데,,아랫집 동생이 아기보러 왔다가 함께 앉아서큰일났다고 지금 안산에 있는 고등학교 아이들이 배사고가 났다고 해서자막을 그제서야 자세히 봤어요.저희 집이 안산이거든요,,,전 하나뿐인 언니를 20살 되던해 잃었습니다.그래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가족을 잃은 마음을 알고있어요,,,엄마와 아빠 그리고 조리 중이었던 저 역시뉴스를 빼놓지 않고 채널을 찾아가며 봤습니다.아이들이 모두 살아돌아오길 기도하면서요.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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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친구와 평소 즐겨가던 칼국수집에서 점심으로 칼국수 먹다가 속보로 뉴스봤습니다. 당시에 앉았던 테이블, 내 자리 다 기억납니다.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보며 안도하며 식사를 했는데 뉴스가 계속 바껴서 황당했었고 그 날부터 매일 뉴스와 속보에 집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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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요일이면 파견 진료를 갔던 의사입니다. 오전에는 근무하느라 뉴스를 보지 못했고 오후 1시반경 파견업체에 도착, 그 곳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식당 밥을 먹으며 제 왼쪽으로 큰 티비가 벽에 달려 있었는데 큰 배가 뒤집어져 있는 화면과 속보 자막을 보았습니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 숫자에 비해 화면 속은 평화로워 보였고 적극적인 구조도 잘 보이지 않아 괴리감이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속보가 오히려 호들갑스럽게 느껴졌었죠. 금방 구조될거라서 저렇게 평온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그런데 그 뉴스 보면서 오한이 나서 밥을 잘 못먹었었어요. 거기 직원 식당 밥맛이 좋아서 일부러 본 근무지에서 밥 안먹고 간건데.. 밥이 맛없었어요..그리고 진료가 오후 2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환자 없을때는 계속 인터넷으로 세월호 뉴스를 봤어요. 서서히 가라앉는 배와 죽어가는 생명과 무능하고 사악한 국가권력을 생생하게 봤어요. 트라우마가 이런거구나..아무것도 할 수없는 무력감.. 오한은 점점 심해지더라구요. 설마.. 어떻게 저럴수가..미안해요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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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침에 식당에서 밥먹으면서 뉴스를 보았어요....분명 전원구조라고 나오길래....당연한거 아냐??? 라고 얘기하면서 밥먹었었는데....조금후엔.......ㅜㅜ 기억하고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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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꼭 밝혀야 합니다.가슴이 무너집니다.다시 생각하고 생각해도꼭 잊지 않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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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당시 학원강사라 남들보다 늦은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고, 뉴스를 보며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먹먹했습니다. 출근을 해서는 부원장님과 이게 무슨일이냐며 구출 됐다더니 아니어서 정말 슬프다. 어떡하냐는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수업중에는 아이들과도 세월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종일 먹먹하며 생존자 소식을 기다렸던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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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날도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고,그날이 마침 구급차 당직까지 서야 했던 날이였구요.한통의 전화를 받고 출동 대길 합니다.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원무과에 다시 전화 해보니 배가 침몰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괜찮다며 큰일 없을거란 소릴 듣고 "사람들만 옮기면 되겠구나"이런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타 출발을 했습니다.출발해서인터넷 뉴스를 보는데..배는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좋지 않은 소식들만 속보로 계속 올라오고 있더군요.팽목항에 도착 해서 대기하고 있다 구조된 사람들을 태운 배가 도착 합니다.구조된 사람들중세명을 태우고 다시 병원으로 이동하는데 아무말도 여쭤 볼 수 없더군요.그냥 이제 괜찮으니 편히 계시라는 말 뿐이 할 수 가 없더군요.그 후에 뉴스는더 참혹한 소식 뿐이 없더군요.다신 이런 일이 이러나지 않았으면 합니다.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분들 좋은 곳으로 가셨을거라 믿고 유족분들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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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점심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켜서 인터넷 CNN을 접속했는데 세월호가 바다위에 떠있는 기울어있는 사진과 기사가 떴었고 차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팩트로 실렸고 읽으면서도 믿기 싫었던 기억...그날 이후에도 CNN에서 글을 읽었는데우리정부의 초기대응이 미흡했다고 했던 기사 ...글쎄요 우리는 여기서 "미흡"이 맞는건지"고의"가 맞는 건지 대통령에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아무 연고없는 나도 그날을 기억하고 계속 기사를 읽으며 관심을 가졌는데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는 이나라 정부의 원수께서는 고의로 기억이 안난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정말 분통이 터져서...그날 의 기억을 말 못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본인발로 스스로 걸어서 팽목항에서ㅓ 바닷속으로 뛰어내렸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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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발병후 항암주사맞을때마다 터져버리는 혈관때문에 가슴에 케모포트 시술을 했었습니다 보통은 2-3년 지나면 제거하는데 저는 재발하면 또 시술하는게 겁나서 이핑게 저핑게 대며 5년을 채우고서야 제거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2014년4월16일...대기실에서 제 이름 불리기만 기다리며 테레비젼보다가 속보로 뜬 세월호 사고..구조속보까지 보고 들어간 수술. 그 수술을 끝내고 나와서 본무섭게 늘어나있는 사망 숫자를 이해 못해 지금까지도 나는 그날 살았는데 꽃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다는 미안함에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참 많이 미안했었습니다.어떻게 그날을 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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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바이올린 제작자이고 저는 그 때 제 공방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는 수강생들이나 가게를 들르는 손님들과 함께 그 비참한 소식에 무척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 종일 아니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비참하고 허무한 감정으로 슬퍼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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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집. 회사-집만 반복하며 무기력하게 살던 나조차도 그날은 기억이 납니다. 내가 의지를 갖고 기억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기억되고 각인된 불행한 시간이지요. 4월은 업무가 많을 때라 휴대폰 카톡조차 확인할 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어요. 동료가 회사 메신저로 세월호 사고 소식을 알려줬지만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그런가부다 하고 계속 업무를 했죠. 메신저가 왔을때 잠깐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던 동료얼굴을 봤을 때 울먹거리고 있길래 참 감정과잉인 분이시네~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자세한 내용을 전해들은게 아니라서 단순히 해상교통사고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다 10시30분쯤인가 급한일 대충마무리하고 핸드폰으로 포털사이트 검색을 했는데 전원구조라는 기사를 보고 동료한테 "전원 구조 됐다네요""라고 전하고 정말 다행이라고 서로 대화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티비를 보시며 저 애기들 어떡하냐고 하시길래 전 너무나도 태연하게 "전원 구조 됐다며"라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엄마가 아니라고 하시며 사고내용을 설명해주셨어요. 뉴스에 아이들 카톡내용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가슴이 너무 아파서 뉴스 잠깐 보다가 저녁도 안먹고 방에 들어와서 트위터며 페이스북만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공중파나 우리나라 기사는 믿을 수가 없다라구요.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쓰는 이유는 그날 했던 일뿐만이 아니라 그날 저의 생각과 감정들까지도 고스란히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절대 침몰하지 않아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진다는 당연한 절대명제를 증명하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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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저는 전업주부였지만 가끔 알바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4.16일은 알바를 하게 되어 아홉시에서 여섯시까지 근무를 했고 중간 점심시간이 있었지만 뉴스를 보진 못했습니다.일이 끝나고 셔틀버스를 타며 처음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집에 오는 내내 차안에서 울었습니다.친한 사람이 있지도 않은 버스안이었지만 누구도 신경쓸수 없을만큼 충격과 슬픔에 울음을 참을수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뉴스만 보며 기적을 바랬습니다.어떻게 그 날을 잊을수 있나요...가슴 아픈 그 날이 잘 기억이 안난다니...분노와 처참함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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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아침 일찍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청소를 하는 일정이었어요. 같이 일하는 친구가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제주도 가는 배가 침몰했는데 다 구조됐대."라고 해서 다행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일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보니 구조된 것은 선원들.. 학생들은 여전히 배 안에. 그 때부터 점차 무서워졌습니다.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그대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TV 로 계속 뉴스를 보고 계셨습니다. 온가족이 잠들기 직전까지 그 반복적인 영상을 계속 봤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구조 소식이 들리길 기도하며 잠들었습니다.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본 세월호는 그저 더 가라앉아있을 뿐이었어요.이 날은 제 생일이자 지인의 생일이라 일산에서 만나서 같이 파주에 있는 중국집으로 이동해서 탕수육과 몇몇 요리를 먹었는데, 그 곳에서도 계속 뉴스를 봤어요. 우리 뿐만이 아니라 사장님도, 다른 손님들도 찬식하며 지켜봤지요. 이틀 째 저녁이니 더 가라앉아있었죠. 세 사람이서 정말 배 안에 공기층이 있는 걸까, 아니라면 빨리 배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꺼내야 하는게 아닐까, 반복되는 뉴스를 보면서 황망해 했어요. 계속해서 가라앉는 배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가라앉는 꿈을 종종 꿨어요. 제발 지금이라도 진상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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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햇살이 따뜻한 평일 오전이었습니다. 간만에 휴가를 나온 외항선원인 친구와 피씨방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임신한 아내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지금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이 침몰중인데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배에 갖혀있대요!"게임을 하던 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서둘러 접고 뉴스기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객선이 반쯤 기울어진 상태의 속보가 떴습니다. 큰일이 났구나. 아, 어떡하지!걱정스러운 마음은 들고 아무것도 손에 안잡혀서 피씨방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속보가 다시 떴습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무사히 구출.""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역시 대한민국 만세, 최고야 정말!" 하며 친구와 얼싸안고 웃었습니다. 아내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화로 공유하며 사담을 나누는 사이, 다시 속보가 보도되었습니다. "전원 구조 기사는 오보. 현재 세월호 완전히 침몰중, 대부분이 배 안에 갖힌 듯"그 어처구니없는 기사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걱정스러운듯 울먹이며 제게 말했습니다. "여보, 저 아이들 구조할 수 있을까요? 잠수부가 있으니까 그래도 구조할 수 있겠죠?"저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이제는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할거야"아내는 제 말을 듣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왜 나는 "그래, 끝까지 가봐야 알지. 다 살릴 수 있어" 라고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당시에는 희망을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더 큰 고문일 것이라 생각해서 차라리 마음을 비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참사를 한 번 더 겪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비극을 육감으로 느꼈습니다. 바로 천안함이라는 사건으로 말이죠. 기억합니다. 저 추운 서해바다에서 장병들이 수장되는 동안 쥐새끼의 무리들은 지하 벙커에 들어가서 안보회의랍시고 틀어박혀있었고, 국방부는 새떼다 오인사격이다 우왕좌왕만 하고 있었죠. 사년이 지난 그 날, 희대의 비극에서도 그 후속정권인 닭대가리들은 그날 일곱시간의 행적조차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아이들이 다 수장되고 나서야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왜 발견하지 못하죠?" 라는 마약취한 잠꼬대나 하고 있는것이 지금의 대통령입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그날의 행적과 그날 언론의 보도들을. 저의 아내도 기억하며 우리 가족 모두가 기억합니다. 저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와 또 친구.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기억합니다. 그 비극의 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이 나지 않는 저 친일파의 후예이자 역사의 쓰레기들이 하루빨리 저 권좌에서 내려와 자신들이 진정 있어야 할 자리로 가길 바라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국민의 분노와 법의 심판이 있어야 할 영원한, 바로 감옥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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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6시에 kbs뉴스를 보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배가 한참 앞 바다에 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그리고 출근해서 일을 하다 세월호 소식을 듣고 가슴을 졸이며 설마 우리나라 정도 되는 나라가 그 배 하나 구조 못할까 하며 일을 했습니다.오후가 되어 세월호 아이들을 많이 구조하지 못했다는 뉴스와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집에 오자마자 뉴스를 보며 배가 침몰되는 과정을 보며 애타하고 있었습니다.그 날은 하루 종일 손에일도 안잡히고 얼마나 슬픔과 원망과 어른으로 죄스러움과 우리나라의 민낯이 이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것에 절망에 빠진 하루였습니다.그리고 중대본에 나타난 대통령을 보는 순간 저건 무슨 시튜에이션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게 뭐가 크게 잘못 되었구나. 우리나라가 정말 잘못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날 이 후 kbs뉴스는 보지도 않으며 대통령과 그 휘하 정권에 대한 믿음이ㅇ상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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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구조됐다는 기사를보고 정말다행이라고 댓글을 달았는데얼마후 오보라고....그리곤.... 이꼬라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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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무슨 일 일어났다는데?" 유럽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로마의 한 한인민박에 체크인 할 때이다. 주인장은 인터넷 뉴스를 보고 말했다. “배가 침몰 했다나 봐." 유럽에 체류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갈 때 쯤 들은 고국의 첫 소식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정말인 듯 한국에서 들려온 비보는 먼 나라의 사건 사고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 인 듯 했다. 그땐 그렇게 무심했었다. 그날은 피렌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이동하던 날이었다. 전날 만나 같이 여행을 보낸 친구를 떠나 보내고 다시 로마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여비가 거의 떨어져 고속열차가 아니라 값싼 레지오날레를 타고 이동했다. 뜨거운 햇빛에 열차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렸더니 옆에 있는 아저씨가 나를 애처롭게 쳐다 봤던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4월 16일은 지나갔다. 일주일이 지나 귀국했을 무렵 세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여행이라는 환상에서 깨기 싫어 그 일들을 무시하고 살았다. 안타까운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분위기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건은 잊혀질 줄로 알았다.하지만 이 참사는 끊임없이 나에게 진실과 마주할 것을 요구했다. 귀를 닫고 눈을 닫으려 해도 그 날의 거대한 사실은 내 머리 속으로 하나 둘씩 쌓여갔다. 그 덕에 참사 후 일년이나 지난 후에야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그날의 사실을 나열한 것 만으로 눈물이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잊혀졌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남은 듯 했다. 이제야 난 그 마음을 이해하겠는데 세상은 전혀 뜻밖의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회는 그 참사를 언급하는 것 조차 두려워하는듯 했다. 슬픔 마저도 통제 받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리고 동생으로부터 들은 그날의 이야기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그날 몇 시간 동안 세월호가 천천히 침몰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 되었고, 그렇게 오래 방송되는 동안에도 결국 구하지 못했음을. TV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느꼈을 국민들의 좌절감과 무력감, 그리고 상실감이 뒤늦게나마 깊게 전해지는듯 했다.난 그날을 기억합니다. 사실 참사때문에 기억나는 날은 아닙니다. 하지만 난 깊이 공감합니다. 만약 기억이 안 난다면 처음의 저처럼 이 사건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그 사건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잊을 수 있겠지요. 모른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거기까지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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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 날을 잊을수 있을까요. 매 시간 답답하며 눈물짓던 시간. 슬퍼서 가슴이 아리던 시간. 그리고 분노의 시간. 그리고 미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