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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친구들을 위해서 많은것을 해주지 못 미안합니다.제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촛불을 드는 것 뿐이네요광화문에 촛불하나 그것밖에 못해드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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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희 학교는 고3 수업 중에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단원고 학생들과 승객들의 사고를 처음 접했습니다. "정말 큰 일이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원 구조라는 보도에 안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큰 배에 탄 그 많은 사람들을 당연히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기만하는 오보였던 것이 드러나고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됐습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반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이 모두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 동생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국민들을 구하지 않았고. 국가가 차가운 바다에 국민들을 버렸습니다. 그 날이 그저 국민의 한 사람인 저도 이렇게 똑똑히, 생생히 기억나는데 대통령은 왜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겁니까. 세월호 사건의 슬픔이 아직도 이렇게 비통하게 가슴에 남아 있는데 국가 권력은 왜 진상규명을 막는 겁니까 세월호 사건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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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21개월 군 복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날을 기다려온 시간만큼 행복한 날이었다. 적어도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는.부모님께 당당한 모습으로 전역 신고를 하고 채 전투복을 벗기도 전에 비보가 전해져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안산"이란 단어가 들려와 멈춘 뉴스에서 난 시선을 뗄 수 없었다."지금 진도로 가야하나?", "가서 무엇을 도울 누 있을까?" 안절부절하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그저 저녁 늦게까지 전투복을 입은채 TV뉴스만을 바라보았다.얼마전 다시 찾은 광화문 광장, 그동안 애써 잊고 지냈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고, 나는 아직 전투복을 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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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글자를 써도 닿지 않음에 애통할뿐입니다.그동안 무지하고 무관심하여 죄송합니다.단원고 학생들과 일반 탑승객들,구조하다 돌아가신분들,살아돌아온 친구들, 남은 가족분들.이분들 모두 희생자 입니다.어느 한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셨을겁니다.수많은 의혹들이 풀려 그날이 더이상 아픈날로만 기억되지 않기를...그리고 그때 대한민국을 바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할수 있는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이제라도 너희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게.너희 가족분들도 일상으로 돌아가실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울게.구조하시다 돌아가신분들의 처우도 개선되도록 힘쓸거야.늦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게.남은건 우리에게 맡겨주고.지금이나마 편하게 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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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 학교에서 저는 한심하게 잠을 자고있었고, 아이들의 웅성웅성 소리에 깨어 세월호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였지만 전원 구조라는 사실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시 잠에 들었고... 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 전혀 다른 상황에 놀랐도 너무 안타까웠고 하염없이 눈물만 났습니다 .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잊지 않을 것 입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201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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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을 잊을 수 없는 건 그 날 제게 좋아하는.교수님 수업을 듣는 오전에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대학원생인 저는 당시 29살, 9시 반 수업 시작 후 사건발생 보도와 전원무사구조 보도를 보고 다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12시 반 수업이 끝나고 우왕좌왕하는 통에 이거 정말 왜 이러지 하며 당황했습니다. 밥을 먹고 과제 하다가 다시 뉴스보고 또 다시 보고 기자 친구들에게 연락해보고...외국에 있던 동생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는 그 날을 기억합니다. 특히 오전을 기억합니다.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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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다른 날들과 다를바 없이 출근해서 열심히 업무중이었는데 회사 서무 담당 언니가 공문을 받고 티비를 틀었어요.그 때 제 생각으로는 그냥 다들 구명조끼 챙겨 입고 해경 도움 받으면 무사히 구조되겠네 하며 별거 아닌걸로 생각했죠. 그러나 답답할 정도로 아무 움직임이 없는 정부를 보며 도대체 뭐하고있는지 평범한 25세의 어린 여성이 생각하기에도 한심해보였습니다.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면 모든 인력을 총 동원할수 있을텐데 ... 그리고 저는 출장을 나갔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는데 그 때는 오전에 봤던 배의 모습과는 조금 많이 달랐어요. 당연히 구출중이겠거니 했지만 선장은 이미 혼자 도망 나간 지 오래고, 함께 배를 탔던 시민이 아이들을 구하는 상황... 그리고 자발적으로 구하러 오셨던 인근 어민들.. 안에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이 갇혀있다는 걸 알고 물공포증이 있는 저로서는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더 소름끼치는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가는걸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거에요..... 그리고 그 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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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소식을 접하고 놀랐다가 전원 구조되었다고해서 안도하며 기뻐했다가 오보라는 사실을 다시 알고 절망에 빠졌던 그날의 그 상황 기분 감정 다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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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들 학교에서 현장학습 가던날 아침에 뉴스보고 소식을 들었었습니다.아침에 녹색 봉사후 지인과 약속이 있어서 준비하고 나가는 순간...전원 구조라는 자막을 보고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좀 홀가분한 기분으로 점심으로 보리밥을 먹고 돌아와서 보니 ㅜ 아침과는 완전 딴 세상이 되어버렸던 날 ㅜ이렇듯 생생하게 생각이 나는데 ㅜ도대체 왜...그랬는지 정확하게 밝혀 죄값을 치르게 해야겠지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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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 여름까지 군대에서 복무중이었고 취사병으로 근무했습니다. 4월 16일에 대해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새벽 근무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침 조리와 점심 조리를 합니다.점심 조리는 보통 아홉시부터 준비가 시작됩니다. 준비를 하려고 식당에 나갔을 때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던 군무원 분이 기억납니다. 뉴스에서는 진도 앞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속보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군무원 분에게 참 걱정이지만 곧 구조되지 않겠냐며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해 2월에 일어났던 리조트 붕괴사고를 떠올리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오며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그것이 잘못 보도된 내용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한시쯤 모든 일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뉴스를 틀었습니다. 뉴스 카메라가 담고 있는 장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새벽 근무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 사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서였는지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몇시간이 지나고 TV를 틀어도 상황은 낙관적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의 7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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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이틀째.어딜가나 교복입은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북적이던 제주. 멀리 마라도가 보이는 송악산을 올라가기전 제주행 여객선이 침몰중이라는 뉴스를 듣고 당연히 구조하겠지 생각하며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 다시 라디오를 트니 한두명 사망,전원구조 라는 소식에 안도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그리고 벌어진 끔찍한 현실...여행이고 뭐고 뉴스만을 지켜보며 경악했는던 그시간...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며 마주친 수학여행단 아이들의 침울한 모습들... 무섭고도 잔인했던,아프고 슬픈 그날 0416.지켜주지못해,구해주지못해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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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학교에서 부모연수가 있어 강당에 앉아있었습니다. 옆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아이친구 엄마가 "수학여행 가던 배가 뒤집혔대" "어머 어째"..."다 구조됐대"휴우 다행이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분들에 비할까마는 저는 그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됩니다. 너무 선명해서 더욱 사무칩니다.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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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취업 준비생이었습니다. 밤새 새로 뜬 구인 광고가 있는지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었죠.. 그날도 일과 시작으로 인터넷을 켰는데 세월호 참사 뉴스가 인터넷에 속보로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티비 뉴스를 켰습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반쯤 기울어져 침몰되고 있었고 그 이후부터 300명 넘는 사람들이 수장되어 가는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모두 가라 앉고 난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소름끼치는 감정들, 참담함, 안타까움, 죄책감, 무력감 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온몸이 떨리도 두려워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하루를...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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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제아네는그날신혼여행사이판에있었습니다한국에서그런끔찍한일이있었다는걸5일정도지난후에알았습니다....저희부부도신혼여행지로제주도를갈뻔했고그배를탓을수도있었습니다박근혜는 세월호당일 7시간 동안 뭘했는지국민앞에 실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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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범한 일상처럼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있던 그날..포털사이트의 속보로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기사가 보였습니다..그리고 조금 뒤 관련 기사로 현장 사진이 보였을때..사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무사하게 구조 될줄 알았습니다..왜냐하면 배는 아직 바다위에 충분히 떠 있었고..주변에는 구조를 하러 온 다른 선박들도 많이 보였기에....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당연히 제가 예상했던것처럼 "전원구조"라는 기사가 올라왔지요..하지만..그냥 그렇게 어느 일상의 소소한 사건사고처럼 기록될 줄 알았던 그날의 일은..어쩌면 제가 살아가며 가장 어이없고 화가나고 슬프고 분노하게 될 사건이 되어 제 기억속에 깊은 상처를 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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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꿈이 사라져가고다른 꿈을 꿀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그 짧았던 시간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 바쳐 일하시던.. 그 분들도 가정이 있고 또 다른 아이들이 있으셨을텐데대체 그 분들이 그렇게 노력하고 고생하는 시간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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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구조 했다는 뉴스를 보곤 안심이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잘못됬음을 알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모두들 구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뉴스를 찾아보았습니다.하지만 더이상 좋은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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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회사 교육에 참석해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기사로 올라온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빨리 구해지길 마음속으로 바라고 곧이어 대부분 구출되었다는 잘못된 뉴스기사. 잠시 안도했지만, 사실이 아니었고, 많은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아이들이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져버린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어른들 잘못이라서 더욱 미안하고 먹먹한 하루가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써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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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날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아이들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내 아이..... 세월호에 있었던 우리 천사들과 동갑인 아이 뒷바리지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 기가 막혀 눈물이 흘렀고 아이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살아 올 거라고 무사히 구조 될거라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기다렸는데 점점 불안해 지고 막막해졌습니다.내 새끼들.... 단원고 학생들... 모든 엄마들의 아이들 우리 단원고 학생들을 위해 꺼지지 않는 촛불을 함께 들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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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시반쯤이었나, 커다란 여객선이 조난을 당했다고 했고, 타고 있던 사람들이 아이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해경이든 헬기든 가서 구조를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 한시반이 넘어 식당에서 커다란 티비로 와이티엔을 보았다. 밥을먹고 나올때 쯤 모두 성공적으로 구출되었다고 했던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왜냐하면 나는 조마조마하지도 않고, 크게 긴장하지도 않았다.시간이 밤인것도 아니었으며, 비가내리거나 바람이 불지도 않았으며, 타고 있는 사람들이 심신미약자등 특수한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먼 바다인것도 아니었기 때문에.당연히모두 구출되리라고 생각했다. 진짜 거짓말 하지 않고, 우리는 그 정도는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아주 당연히 그 사람들이 작은 생채기 까지는 모르겠지만, 죽을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는 아주 천천히 기울고 있었으며, 내가 만약 그 배에 타고 있었따고 하더라도, 그냥 헤엄을 쳐서 나오더라도 아주 불편함 없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악마들.아이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그대로 있으라고 하고, 아주 긴 시간동안 무능했다. 차라리 그대로 있으라는 말 조차도 못할정도로 무능했으면 그냥 무능했다고 이해할 것인데, 아이들을 겁주고, 마치 어른들과 기존 국가의 질서에 잘 따르면 모두 행복하게 구출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환상을 심어준 다음, 그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 그 기사가 잘 못 되었다고 했고, 구조된 사람은 아주 작은 수라고 했다. 아이들은 아주 많이 죽었거나 실종되었다고 했고, 다 죽은 다음에야 구조가 시작되었다. 악마들.무능은 최악의 악행보다도 더 나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한번 말한적이있다.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가야한다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나라 혹은 인류 문명은 무슨 의미가 있냐고 까지 말했다. 인류가 오래 살고 싸이버세계, 무인 자동차 다 씨발 집어치우라고 해.고백하자면,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보도연맹 사태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학살당했다. 아마도 손을 묶인채로 구덩이에 밀쳐진채로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 총알을 맞았거나,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에는 그런 무섭고 비참한 이야기가 길게 전해져 내려오는데, 나는 세월호가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을 죽인사건이다. 하여튼 오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TV를 보거나 네이버를 새로고침했다. 아이들은 구조되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은 죽은채로 우리에게 돌아왔고, 어떤 몇명은 아직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죽었든 살았든 돌아오지 않으면 그 부모는 아마 기다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