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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여느때와 같이 흘러나오던 라디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봤지만 단 하나의 기사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라디오에서 반복하는 말뿐 .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있느니만 못한 것들이었다.지하철역에서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들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이 놓여 눈물이 났다. 누구에게 감사한걸까 하지만 모두 살아 있단 소식에 감사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두 시간 남짓. 그동안 내가 믿은 것은 허상이었다. 누군가는 사람들을 배 밖으로 인도해줄 것이고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구해줄 것이고 누군가는 원인을 밝히고 다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 누군가가 되지 못한 나는 마음을 다해 무사하길 바라며 기다렸다, 나의 바람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면서.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하길 기다리면서. 그런데 나의 두 시간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 시간처럼 이 날이 기억속에서 사라질까봐 두렵다. 나는 진실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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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뉴스와 티비 하나로 구조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아니라는 이야기 정말 분통터지는 이야기밖에 안하는 방송들 그러나 그사람들은 입을 닫고 있네요 우리는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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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늦잠을 자는 날. 중간에 깼을 때, 앵커는 전원구조라고 했어요. 사고 소식에 놀랐지만 모두 구조했다니 다행이다하고 다시 잠이 들었죠. 점심 무렵에 눈을 떴더니 배가 가라 앉고 있다네요. 아이들이 아직 그 배 안에 남아 있다네요. 꿈인 줄 알았어요. 아직 덜 깼나 했죠. 하지만 새빨간 속보 자막은 계속 아이들이 그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티비만 응시했습니다.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란 말을 들을 때도 꿈이다 싶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표자가 된다는 건, 그 나라의 기쁨과 슬픔 모두를 어깨에 짊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걸 모른다면, 외면하겠다면 그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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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학원 가서 수업 전 20분간삼각깁밥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어요.혼자 밥먹기 외로워서 핸드폰으로 뉴스보는데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너무 걱정 됐는데 전원 구조됐다는 속보 보고 다행스럽게 여겼네요. 그리고 수업끝나고 집에 갔더니 오보보고서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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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작시간을 훨씬 지나 문학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표정은 좋지않았고 반장이였던 나는 선생님을 일찍 부르지않아 화가 나신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였다.그리고 그때 들었다 선생님의 지난 근무지는 단원고였다는 것을. 지금 그때로 돌아가도 선생님께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과거의 나도 친구들도 아무말도 하지못했다. 교실은 간간히 슬픔을 숨기는 소리만 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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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저는 의사였고 인턴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파트가 외과였기 때문에 아침마다 해야하는 드레싱을 하고 있었습니다.TV에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보았고 드레싱해주던 환자랑 얘기를 나눴어요. 그래도 전원 구조되어서 다행이라고..그때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 날은 정말 전국민 모두에게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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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7시간 동안에 발빠른 정부의 대처와 구조가 이루어졌다면 세월호에 타고 있던 우리의 가족들은 차가운 바다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12월5일 청문회에서 7시간에대한 질의가 이루어졌지만 제대로된 답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않고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세월호에 타고있었던 우리들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국민은 끝까지 포기하지말고 악행을 저지른 이들과 투쟁해야합니다.Remember 4.16 - 19살 여고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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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7시간이 흘러가고 있던 당시 저는 군대 훈련소에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날 저희 소대는 급히 식당에 모였었고 조교들이 소대원들 중 단원고에 다니는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큰 사건이었다는 것을요. 저는 단순히 안타까운일 정도로 쉬이 여겼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아직도 훈련소에 있어 사회와 단절되있을 때만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저는 모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고단한 2년을 보내왔고 그 당시의 7시간은 얼마나 더 처절했을지를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저는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반성합니다. 죄송합니다.너무 늦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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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대강당에서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다들 교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털사이트에 떠있는 "세월호 침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친구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전원 구조라는 사실에 다행이네 라며 핸드폰을 끄고 강의는 시작했다. 많은 인원이 듣는 강의에 지루해질 무렵 다시 핸드폰을 켰고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뉴스가 떴다. 강의를 듣는 3시간 동안 생존자의 이름이 뜨는 것을 새로고침했다. 점점 줄어드는 수에 나까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나이대의 동생이 있었기에 내 동생이 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을 기억한다. 구조도 하지 않아 민간인들이 아이들을 구조했던 그 시간을. 내 가족이 희생 당한 것 마냥 가슴 아팠던 그 날들을. 나는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만 들으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노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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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할때만해도 금방구조될줄알았는데 많은희생자들이나왔다 분명 전원구출했다고했으면서 허위보도였고 시간이지날수록 구조된인원수가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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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졌습니다. 평소처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속보가 떴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기 전 아침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조금 전에 인터넷에서 본 뉴스내용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전원 구출." 다행이다 생각하며 학교에 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들리지 않는 교내방송에 귀 기울이며 정류장까지 걸어갔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아침과는 다른 뉴스 내용에 당황하였습니다. 한참을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매일 뉴스만 보았습니다.아침에 전원 구출이라는 말을 듣고 학교에 갔고 집에 오는동안 잊고 있었습니다.이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2014년 4월 16일을 언제나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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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상경하여 자취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던 그날, 익숙해지지 않는 타지 생활의 두려움으로 좀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던 그 해의 봄, 어제도 그제도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컵라면과 삼김 하나로 간촐한 밥상을 차려 놓은 채 티브이를 틀었고, 그날의 참사를 내 방 구석에서 속보 몇 자로 접했다. 티브이를 통해 느껴지던 떠들썩한 바깥 세상과의 괴리가 그날만큼 나의 어딘가를 쥐어짜내는 슬픔으로 느껴진 적 없었다. 방 한 칸에 짊어지고 살았던 나 한 사람의 우울과 두려움이 해일처럼 다가온 슬픔 앞에 수몰되었다. 밤이 늦도록 마음 졸이며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죄스럽고 미안했다. 내가 많이 보잘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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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다.아무것도 모른채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저녁즈음이 되서야 소식을 알게 되었다.구출이 가능할거라는, 구출 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안심했다.나는 몰랐다.어두운 바다는 모든걸 삼켜버린다는걸거짓 가득한 뉴스에 눈을 감았다.햇살 같던 웃음들이꿈을 말하던 별들이거짓의 무게에 가라앉아버렸다.속에 반짝임을 가득 품었던 아이는반짝이는 별이 되고 말았다.어두운 바다엔 많은 진실들이 가라앉아있다.나는 이제 알고 있다.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폭풍이 몰아치면 바다는 뒤집힌다.내가, 우리가 폭풍이 되야 한다는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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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학교에서 강의 듣던 중 옆에 앉은 동기가 나에게 말했다. 배가 물에 빠졌다고 강의 듣던 중이라 대충 아 그래? 구조 하는 중이래? 라는 나의 물음에 바로 구조 작업을 해서 전원 구조 했다는 답에 다행이라고 했었다. 다행이라고 말한 것도 잠시 쉬는 시간 기사를 확인해보니 전원 구조는 거짓 오보였다는 사실을...... 그 날 나는 나의 당연하다 생각한 학창시절을 되돌아봤고 그게 세월호 학생들에겐 당연한게 아니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세월호 희생자 분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희생자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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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으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전원구조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는데 얼마안있어 다시 뉴스를 보니까 오보였고 배안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속보를 보았다. 엄마랑 놀라서 무슨일이냐고 계속 뉴스속보만 보고있었다. 배안에서 구조되는 사람은 없고 실종자만 계속 들어나는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밤에도 생중계로 진도체육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것으로 기억한다. 밤새 나도 한명이라도 구조되어 나오길 기다리며 그 중계를 봤다 새벽 2시가 넘어서였나. 그냥 중계를 보면서 인터넷을 하고있었는데 그때는 체육관안에도 좀 어두웠던걸로 기억한다. 근데 화면에는 안잡히는데 한 아버님이 큰소리로 소리를 치시는게 들렸다. 그 소리는 절규였다. 내아이가 저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수 없는 현실앞에서 무너지는 아버님의 절규소리를 듣는데 정말 마음이 너무 찢어졌다. 이런상황에서 나도 이렇게 지켜보는것 밖에 못해서 답답하고 화가나고 미치겠는데 자식을 눈앞에 두고 못구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감히 내가 상상도 못하는 고통이겠지.. 4년이 지나고도 나는 그 절규소리가 안잊혀진다.... 잊을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다 내가 죽을때까지 세월호는 절대 못잊을거다. 이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들.. 그 유가족들을 위해서 세월호의 진실 꼭밝혀내야 하고 .. 꼭 밝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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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이 흘렀는데도 엊그제 같을 정도로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절대 이 날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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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중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 애들과 같은 나이의 동생을 둔 언니였다. 나는 늦잠을 잤고 10시쯤 일어나 제일 먼저 포털 검색순위를 확인했다. 1위에는 세월호라는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검색어를 눌러보니 배라고 한다. 그 배가 침몰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나는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다. 인터넷 기사를 보고 믿겨지지가 않아서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켰다. 모든 채널이 긴급속보라는 말머리를 내걸고 있었고 앵커들은 애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앵커 뒤에 보이는 저 배경은 바다인가. 저 빼끔하니 물 밖으로 나와있는 짙은 색이 배인가? 배처럼 보이지 않는 저것이 세월호인가? 믿겨지지 않았다. 믿겨지지 않는 속도로 세월호는 움직이지 않는 듯이 점점 모습을 감춰갔다. 무력하게 리모컨을 쥐고 있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소름이 돋았고 이기적이게도 고등학생이라는 그 아이들을 보며 학교에 잘 있을 내 동생 걱정이 먼저 되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그런 나를 잊고자 희망을 가졌다. 산소를 주입하면 살 수 있다더라, 저 안에서 아직 연락이 온다더라. 그런 말을 다 믿었고 전국에서 도와주러 가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기에 이건 잠시의 악몽일거라고 믿었다. 고등학생 아이들,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 어른들, 다들 뭍으로 나오길 바랐다. 봄이어도 바다는 너무 차가웠을텐데. 늦잠을 잔 그날 오히려 더 늦게 일어날 걸 그랬다. 시시각각 찍혀 올라오는, 점점 저 아래로만 내려가는 세월호의 사진을 눈에 담으면서 이것이 내가 끝없이 싸워야 할 실체있는 절망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예 더 깊이 잠들어 한참 나중에 일어날 걸 그랬다.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노란 팔찌를 차고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7시간은 편한 마음일 것이다. 모두가 나눠가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모르는 그 세상은 얼마나 편안할까.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의 가방에 달려있는 노란 리본이 내 목을 얼마나 메이게 하는지 모를 그 사람의 세상은 평화롭겠지. 공포와 배신감이 가득했던 그 사건의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 전부가 팽목항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몇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을 산다고 해서 과거를 잊은 것은 아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계속 진행되고있는 현실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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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친구의 생일였다. 생일 축하를 위해 모인 우리는 차마 웃고 떠들 수 없었다.아침부터 우리가 만난 그 저녁까지 이어진 소식에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 핸드폰만 보고, 티비 뉴스를 보고 들었다. 한명이라도 더 구조되길, 제대로 꽃 피워 보지도 못한 그 인생이 그대로 시들어 버리지 않기를, 소중한 가족들을 두고 그곳에서 허망하기 떠나버리지 마시기를.그 후 3일 밤낮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티비도 없는 좁은 자취방에서 노트북으로 생중계 뉴스만 보고 있었다. 자꾸 접근이 어렵다며 구조작업에 지지부진한 현장을 접하며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 때의 일로 한동안 우울증을 겪었었다. 이겨내기 위해 뉴스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래도 다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있겠지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아직까지도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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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매일같은 날이었다 . 그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수학여행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에 걱정이되어 티비 앞에 앉았다 다행이 모두를 구했다는 무사하다는 오보에 그저 안도하며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몇시간도 되지 않아 수정된 보도가 계속 올라올때 까지만 해도.... 새로운 소식이 계속 올라올때 내가 했던것은 그저 계속 새로 올라오는 보도를 보는것뿐이었다. 내게도 안타깝던 그시간. 너희에겐 얼마나 무섭고 가족에겐 모든 희망을 걸었을 시간이었을텐데 그 시간이 그렇게 낭비되고 있을 줄도 모르고 그저 보도만을 믿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수 많은 아이들이 그 가족이 고통스럽던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저는 아직 그 날을 기억합니다 잊지 않을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그것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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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일찍 일어나 독서실에 가서 컴퓨터를 켰어. 그리고 확인한 네이트 뉴스에선 수학여행 가던 배가 침몰했대 근데 전원 구조했대! 와 다행이다 하고 인강을 들었는데 하필 그날 해상보험에 관한 내용을 배우는거야 뭔가 기분이 쎄했는데 구조됐으니까~ 이러고 넘겼는데 오후에 확인한 뉴스에선 난리도 아니더라.. 남자친구랑 통화에선 진짜 다행이라면서 자연스럽게 제주도 여행 얘기로 넘어갔었는데.. 그때 그 말 한 내자신이 아직도 생각나고 전원 구조가 오보라고 떴던 그 뉴스가 생생해 ... 부디 좋은 곳에서 아프지말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