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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저는 의사였고 인턴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파트가 외과였기 때문에 아침마다 해야하는 드레싱을 하고 있었습니다.TV에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보았고 드레싱해주던 환자랑 얘기를 나눴어요. 그래도 전원 구조되어서 다행이라고..그때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 날은 정말 전국민 모두에게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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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7시간 동안에 발빠른 정부의 대처와 구조가 이루어졌다면 세월호에 타고 있던 우리의 가족들은 차가운 바다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12월5일 청문회에서 7시간에대한 질의가 이루어졌지만 제대로된 답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않고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세월호에 타고있었던 우리들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국민은 끝까지 포기하지말고 악행을 저지른 이들과 투쟁해야합니다.Remember 4.16 - 19살 여고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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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7시간이 흘러가고 있던 당시 저는 군대 훈련소에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날 저희 소대는 급히 식당에 모였었고 조교들이 소대원들 중 단원고에 다니는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큰 사건이었다는 것을요. 저는 단순히 안타까운일 정도로 쉬이 여겼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아직도 훈련소에 있어 사회와 단절되있을 때만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저는 모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고단한 2년을 보내왔고 그 당시의 7시간은 얼마나 더 처절했을지를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저는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반성합니다. 죄송합니다.너무 늦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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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대강당에서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다들 교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털사이트에 떠있는 "세월호 침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친구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전원 구조라는 사실에 다행이네 라며 핸드폰을 끄고 강의는 시작했다. 많은 인원이 듣는 강의에 지루해질 무렵 다시 핸드폰을 켰고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뉴스가 떴다. 강의를 듣는 3시간 동안 생존자의 이름이 뜨는 것을 새로고침했다. 점점 줄어드는 수에 나까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나이대의 동생이 있었기에 내 동생이 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을 기억한다. 구조도 하지 않아 민간인들이 아이들을 구조했던 그 시간을. 내 가족이 희생 당한 것 마냥 가슴 아팠던 그 날들을. 나는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만 들으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노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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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할때만해도 금방구조될줄알았는데 많은희생자들이나왔다 분명 전원구출했다고했으면서 허위보도였고 시간이지날수록 구조된인원수가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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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졌습니다. 평소처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속보가 떴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기 전 아침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조금 전에 인터넷에서 본 뉴스내용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전원 구출." 다행이다 생각하며 학교에 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들리지 않는 교내방송에 귀 기울이며 정류장까지 걸어갔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아침과는 다른 뉴스 내용에 당황하였습니다. 한참을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매일 뉴스만 보았습니다.아침에 전원 구출이라는 말을 듣고 학교에 갔고 집에 오는동안 잊고 있었습니다.이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2014년 4월 16일을 언제나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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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상경하여 자취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던 그날, 익숙해지지 않는 타지 생활의 두려움으로 좀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던 그 해의 봄, 어제도 그제도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컵라면과 삼김 하나로 간촐한 밥상을 차려 놓은 채 티브이를 틀었고, 그날의 참사를 내 방 구석에서 속보 몇 자로 접했다. 티브이를 통해 느껴지던 떠들썩한 바깥 세상과의 괴리가 그날만큼 나의 어딘가를 쥐어짜내는 슬픔으로 느껴진 적 없었다. 방 한 칸에 짊어지고 살았던 나 한 사람의 우울과 두려움이 해일처럼 다가온 슬픔 앞에 수몰되었다. 밤이 늦도록 마음 졸이며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죄스럽고 미안했다. 내가 많이 보잘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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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다.아무것도 모른채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저녁즈음이 되서야 소식을 알게 되었다.구출이 가능할거라는, 구출 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안심했다.나는 몰랐다.어두운 바다는 모든걸 삼켜버린다는걸거짓 가득한 뉴스에 눈을 감았다.햇살 같던 웃음들이꿈을 말하던 별들이거짓의 무게에 가라앉아버렸다.속에 반짝임을 가득 품었던 아이는반짝이는 별이 되고 말았다.어두운 바다엔 많은 진실들이 가라앉아있다.나는 이제 알고 있다.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폭풍이 몰아치면 바다는 뒤집힌다.내가, 우리가 폭풍이 되야 한다는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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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학교에서 강의 듣던 중 옆에 앉은 동기가 나에게 말했다. 배가 물에 빠졌다고 강의 듣던 중이라 대충 아 그래? 구조 하는 중이래? 라는 나의 물음에 바로 구조 작업을 해서 전원 구조 했다는 답에 다행이라고 했었다. 다행이라고 말한 것도 잠시 쉬는 시간 기사를 확인해보니 전원 구조는 거짓 오보였다는 사실을...... 그 날 나는 나의 당연하다 생각한 학창시절을 되돌아봤고 그게 세월호 학생들에겐 당연한게 아니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세월호 희생자 분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희생자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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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으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전원구조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는데 얼마안있어 다시 뉴스를 보니까 오보였고 배안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속보를 보았다. 엄마랑 놀라서 무슨일이냐고 계속 뉴스속보만 보고있었다. 배안에서 구조되는 사람은 없고 실종자만 계속 들어나는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밤에도 생중계로 진도체육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것으로 기억한다. 밤새 나도 한명이라도 구조되어 나오길 기다리며 그 중계를 봤다 새벽 2시가 넘어서였나. 그냥 중계를 보면서 인터넷을 하고있었는데 그때는 체육관안에도 좀 어두웠던걸로 기억한다. 근데 화면에는 안잡히는데 한 아버님이 큰소리로 소리를 치시는게 들렸다. 그 소리는 절규였다. 내아이가 저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수 없는 현실앞에서 무너지는 아버님의 절규소리를 듣는데 정말 마음이 너무 찢어졌다. 이런상황에서 나도 이렇게 지켜보는것 밖에 못해서 답답하고 화가나고 미치겠는데 자식을 눈앞에 두고 못구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감히 내가 상상도 못하는 고통이겠지.. 4년이 지나고도 나는 그 절규소리가 안잊혀진다.... 잊을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다 내가 죽을때까지 세월호는 절대 못잊을거다. 이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들.. 그 유가족들을 위해서 세월호의 진실 꼭밝혀내야 하고 .. 꼭 밝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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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이 흘렀는데도 엊그제 같을 정도로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절대 이 날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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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중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 애들과 같은 나이의 동생을 둔 언니였다. 나는 늦잠을 잤고 10시쯤 일어나 제일 먼저 포털 검색순위를 확인했다. 1위에는 세월호라는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검색어를 눌러보니 배라고 한다. 그 배가 침몰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나는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다. 인터넷 기사를 보고 믿겨지지가 않아서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켰다. 모든 채널이 긴급속보라는 말머리를 내걸고 있었고 앵커들은 애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앵커 뒤에 보이는 저 배경은 바다인가. 저 빼끔하니 물 밖으로 나와있는 짙은 색이 배인가? 배처럼 보이지 않는 저것이 세월호인가? 믿겨지지 않았다. 믿겨지지 않는 속도로 세월호는 움직이지 않는 듯이 점점 모습을 감춰갔다. 무력하게 리모컨을 쥐고 있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소름이 돋았고 이기적이게도 고등학생이라는 그 아이들을 보며 학교에 잘 있을 내 동생 걱정이 먼저 되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그런 나를 잊고자 희망을 가졌다. 산소를 주입하면 살 수 있다더라, 저 안에서 아직 연락이 온다더라. 그런 말을 다 믿었고 전국에서 도와주러 가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기에 이건 잠시의 악몽일거라고 믿었다. 고등학생 아이들,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 어른들, 다들 뭍으로 나오길 바랐다. 봄이어도 바다는 너무 차가웠을텐데. 늦잠을 잔 그날 오히려 더 늦게 일어날 걸 그랬다. 시시각각 찍혀 올라오는, 점점 저 아래로만 내려가는 세월호의 사진을 눈에 담으면서 이것이 내가 끝없이 싸워야 할 실체있는 절망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예 더 깊이 잠들어 한참 나중에 일어날 걸 그랬다.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노란 팔찌를 차고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7시간은 편한 마음일 것이다. 모두가 나눠가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모르는 그 세상은 얼마나 편안할까.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의 가방에 달려있는 노란 리본이 내 목을 얼마나 메이게 하는지 모를 그 사람의 세상은 평화롭겠지. 공포와 배신감이 가득했던 그 사건의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 전부가 팽목항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몇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을 산다고 해서 과거를 잊은 것은 아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계속 진행되고있는 현실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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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친구의 생일였다. 생일 축하를 위해 모인 우리는 차마 웃고 떠들 수 없었다.아침부터 우리가 만난 그 저녁까지 이어진 소식에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 핸드폰만 보고, 티비 뉴스를 보고 들었다. 한명이라도 더 구조되길, 제대로 꽃 피워 보지도 못한 그 인생이 그대로 시들어 버리지 않기를, 소중한 가족들을 두고 그곳에서 허망하기 떠나버리지 마시기를.그 후 3일 밤낮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티비도 없는 좁은 자취방에서 노트북으로 생중계 뉴스만 보고 있었다. 자꾸 접근이 어렵다며 구조작업에 지지부진한 현장을 접하며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 때의 일로 한동안 우울증을 겪었었다. 이겨내기 위해 뉴스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래도 다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있겠지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아직까지도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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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매일같은 날이었다 . 그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수학여행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에 걱정이되어 티비 앞에 앉았다 다행이 모두를 구했다는 무사하다는 오보에 그저 안도하며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몇시간도 되지 않아 수정된 보도가 계속 올라올때 까지만 해도.... 새로운 소식이 계속 올라올때 내가 했던것은 그저 계속 새로 올라오는 보도를 보는것뿐이었다. 내게도 안타깝던 그시간. 너희에겐 얼마나 무섭고 가족에겐 모든 희망을 걸었을 시간이었을텐데 그 시간이 그렇게 낭비되고 있을 줄도 모르고 그저 보도만을 믿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수 많은 아이들이 그 가족이 고통스럽던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저는 아직 그 날을 기억합니다 잊지 않을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그것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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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일찍 일어나 독서실에 가서 컴퓨터를 켰어. 그리고 확인한 네이트 뉴스에선 수학여행 가던 배가 침몰했대 근데 전원 구조했대! 와 다행이다 하고 인강을 들었는데 하필 그날 해상보험에 관한 내용을 배우는거야 뭔가 기분이 쎄했는데 구조됐으니까~ 이러고 넘겼는데 오후에 확인한 뉴스에선 난리도 아니더라.. 남자친구랑 통화에선 진짜 다행이라면서 자연스럽게 제주도 여행 얘기로 넘어갔었는데.. 그때 그 말 한 내자신이 아직도 생각나고 전원 구조가 오보라고 떴던 그 뉴스가 생생해 ... 부디 좋은 곳에서 아프지말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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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기억...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공 수업 시작 전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평소와 같이 포털사이트 어플을 켰고, 한 여객선이 침몰을 하였으나 전원 구조 되었다는 헤드라인을 읽게 되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세월호 전원구조"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그저 작은 해프닝이겠거니 생각하였고, 휴대폰이 금지된 수업이었기에 잠시 꺼 두고 두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켠 포털 사이트는.. 그새 충격적인 헤드라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존 백여명 과 실종 삼백여명....... 믿기지 않는 숫자에 주변 친구들과 얘기를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뒤로 계속 인터넷을 확인하며... 정말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경악하고 눈물 흘리고.. 그 안 아이들이 남긴 문자와 영상들에 오열했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던 아이들에게 국가는 없었다...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고 있다. 시간은 이렇게나 흘렀으나 아직도 제대로 된 진실 하나 밝혀진 것이 없고. 세월호는 아직도 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으며 아직도 나오지 못한 실종자 들이 있다. 인양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에 분노한다. 누군가는 이제 다 지난 일이라며 잊으라고 하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이 사건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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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첫 출근을 위해 통근버스에 앉아 출발할때 기다리면서 켜져있는 테레비 보고있는데.. 전원구조 했다고 속보떠서 안심하고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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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소소하게 집안일을 하다가뉴스를 보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그 자리에 앉아 무릎꿇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아이들 제발 살아돌아오게 해달라고....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잊습니까...고교교사로 근무하는 남편과 통화하며 울었습니다. 아이들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자식이 수장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던 팽목항의 그 가족들이 너무나 슬퍼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 후로는 이 나라 에 대한 실망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자식을 잃은 슬픔속에서도 진상을 밝혀달라는 유가족들을 선동세력으로 매도하는 정부와 인터넷의 댓글들이 너무 끔찍해서 괴로웠습니다. 밝혀주세요...밝혀주세요..세월호 가족들을 이제라도 제발 진실의 이름으로 위로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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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가 채 되기 전이었나, 속보로 뜬 기사로 세월호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때 잠깐 기사를 보고 별 생각없이 "지금 여객선 침몰하고 있대! 어떡해, 다 구조 됐으면 좋겠다." 하고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잠시 뒤에 친구가 "전원 구조 됐대!" 라는 말을 해서 다행이다. 하고 그 일은 우리에게서 잠시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2교시부터 8교시까지 연속된 강의를 들으며 지친 제가 집으로 돌아갈 때 쯤, 전원구조는 오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제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진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 동안 거의 며칠간 매일 TV앞에 앉아 더 구조된 사람은 없을까 확인하고, 매일을 울었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이 풀릴 때까지 항상 옆에서 같이 울어드리겠다고 생각했고,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잊게되고, 무뎌졌던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저는 앞으로 계속해서 그들을 주시할 것이고 절대 희생자 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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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평소와 다름이없는 날이였다.좀뒤늦게 일어나물한잔마시고컴퓨터를 키고인터넷사이트를들어가니 세월호 뉴스들이쏟아지고있었고내가본건 전원구조라는 뉴스였다.처음엔 전원구조라니 다행이구나 라고 생각하기도잠시 단 ,몇분사이에상황은 점점 악화 되어가고있었고 좀더 자세히 보기위해 뉴스를틀었다.보면서도 믿기지않았다. 그날하루종일 충격이 가시질않았다.아니 절대로 그날은 잊혀지지않는다.날을새면서까지 몇일동안 계속해서 두눈으로 계속봐왔다 잘못된오보의연속언론인들의 행동 비상사태의 대한 국민을 위한 국민들을위해 존재하는사람들의 안일한 태도들 두눈으로 지켜보았다. 난 절대 앞으로도 그날을 잊지못한다아니 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