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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5일 세월호 사고가 있기 하루 전 날은 102보충대에 남자친구가 훈련병으로 군입대를 하던 날이었습니다. 남자친구 어머님이 남자친구가 장남이라 그러신지 너무 많이 우셔서,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긴장해서 그런지, 집에 도착해서 쓰러지다시피 잠들었는데, 일어나서 휴대폰 확인해보니 4/16일로 날짜가 바뀌어 있었고, 부재중전화가 4통 아버님으로부터 MMS로 장문의 문자가 와있었습니다. 남자친구 동생이 탄 배에 사고가 나서 알아보러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너무 충격받아서 손이 벌벌 떨리고 어디에 연락하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멍청하게 서 있었던게 너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남자친구 가 입대 전 통화로 해준 말도 너무 생생합니다. 자기 동생이 어머님이 본인 입대하는 것에만 신경쓰셔서 자기도 내일 집에 없는데 서운해하면서 장난식으로 나도 입대해야겠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세월호 유가족이 되서 보충대 중간에 잠시 나왔습니다. 남자친구는 어머님 곁을 지켜드리느라 정말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다시 들어가야 되는 것도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남자가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도 사실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군복무 중에도 사정을 아는 남자친구 주변 친구들은 제가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 남자친구한테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신신당부 했었습니다. 전역 하고 나서 저에게 해준 이야기는 군에 있을 때 세월 호 유가족인 것을 군동기 모두 모르게 했다고 합니다. 시선도 너무 힘들었고, 군에 있다보니 정보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어서,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고, 휴가 때 마다 어머님 곁에 있어 드리느라 정신 없어했습니다. 저는 직접적인 유가족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저까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 일이라는게 참 모르는 것이구나. 가끔 뉴스에 세월호 자료화면이 나오면 마음이 너무 우울합니다. 저 안에 도련님이 있었을 거 생각하니까 서로 갇힌 시간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진상규명 집회도 하고 이것 저것 하는데, 남자친구 와 저 사이에는 그냥 금기어처럼 되버렸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왜 꼭 힘없는국민이어야 합니까...너무 속상하고 참....가족을 잃은 사람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왔는데,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던 분들은 그 7시간동안 어떤 의무를 다하셨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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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 둘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놓고6개월된 아들과 티비를 보고 있었어요.뒤집혀 반쯤 가라앉은 배 위로커다란 자막으로전원 구조...... 라고 하길래어머 우리나라가 왠 일로 전원구조했다니 정말 다행이야이 두가지 생각을 하며하루종일 생중계를 보았습니다.그야말로 아이들과 승객들이수장 당하는 것을 생중계로 본 것이지요.....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수 없는제 인생의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요...부디 7시간의 진실이 밝혀져서희생자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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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저는 학생이라 사건 당일에 아홉 시까지 듣는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수업을 들으면서도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계속해서 소식을 받고 점점 늘어나는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를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했습니다. 저는 그저 나라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가까이 그 많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걸 무참히 무시하고 넘겨버린 것이 정말 화가 납니다. 매년 4월 16일이 되면 눈물부터 납니다 유가족들의 인터뷰 내용만 봐도 눈물이 나고 관련된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나네요. 이제 꽃을 피우려 준비하고 있던 소중한 사람들이 처참히 죽어갔다는 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제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2014년 4월 15일 그때로 돌아가 세월호를 타지 말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네요. 아픔을 겪은 단원고 학생 분들, 그리고 여러 탑승객 분들 그리고 모든 유가족 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고 대신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remember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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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했습니다. 오열하는 부모들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아마 현실감을 상실했던 모양입니다. 설마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뉴스에서 울부짖는 그들을 바라보며, 잔혹하고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상상만으로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안엔 결코! 누구도! 있어선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비통함에 목이 잠기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왜 구해내지 못한 것인지.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겠습니다. 왜 그 부모들이 아직도 절규해야 하는지......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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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도 안될...잊어서도 안될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도 슬픈일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진상규명 되는날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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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처음 봤어요. 전원 구조를 했다기에 다행이라 생각했고 쉴새없이 나오는 소식과 오보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들이 언급하셨고요. 근로를 하러 가서도 어쩌면 좋냐며 교수님들과 얘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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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공강이라서 휴게실에서 친구와 휴대폰을 하며 놀던 도중 뉴스를 보게되었습니다.전원 구조 오보를 보고 안심하며 계속 놀았습니다. 깍두기모양 쿠션 위에서 뒹굴거렸던 생각이 납니다.설마 대형사고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선체가 얼마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였기때문에 창문을 깰수도 있고 빠르게 위로 대피시켜서 뛰어내리게 하면 시간도 있겠다, 당연히 구해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세월호의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있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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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관사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전날 동대구에서 대전으로 운행을 마치고 대전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조금은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았다.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고, 그래도 모두 무사할줄 알았다. 다시 동대구로 돌아오는 열차를 운행하고 뉴스를 다시 접하고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과 그래도 일말의기대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부가 없었다.3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옛어른들의 말씀이 빗말이 아님을 느낀다. 눈에 넣어도 안아플 자식. .지금도 세월호는 나의 마음속 짐이며, 평생 미안함과 죄책감일 것이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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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된 뉴스와 오보라는 속보가 오가는 인터넷창을보면서 회사에서 카카오톡으로 채팅을 했었다. 이게 내가 보는게 맞나이나라가 이렇게 아이들을 죽이려고하나 분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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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의 4월 16일에 수능을 앞둔 고3이었습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쉬는시간에 선생님께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수학여행을 가던 배가 사고가 났는데, 모두가 구조되었다고. 다행이라고. 우리학교도 수학여행을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갔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자습실로 올라갔을때, 들었던 소식이 오보였음을 들었고, 공포감에 몸이 떨렸습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들이, 수학여행길에 차가운 물에 빠져 얼마나 무서웠을까. 저는 그 7시간 동안 문제나 풀고 앉아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고, 밥을 챙겨먹고, 당연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추억과 함께 일상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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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여느 때와 같이 아침 10시쯤 일어났다. 강의를 들으러 가려고 씻고 폰으로 기사를 습관적으로 봤다. 여객선이 침몰했다고 했다. 처음엔 분명 전원구조였는데 점점 구조인원이 줄어갔다. 300명, 200명... 그러다가 강의를 들으러갔고 그날은 강의가 많아서 6시쯤 하숙집에 도착했다. 곧바로 과제가 있어서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 창을 열었다. 네이버였던 것 같다. 300여명이 침몰한 배에 있다고 했다. 내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별일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날 밤에 동기와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침에 침몰했다는 기사봤어? 난 걔들 꼭 구조됐으면 좋겠어.. 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애들이 고2인데 진짜 안타까워 걔네도 수학여행 간다고 나한테 자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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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른없이 9시 출근하여 원생들의 간식을 준비중이였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교에 다니는 딸아이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어떡해 .......스마트폰으로 속보를 보고는 저렇게 큰배니까 기울어 지는 시간동안 충분히 몬든 승객을 구할수 있을거라 믿고 맏겨진 일을 하여습니다 . 원생들 점심까지 마치고 다시본 뉴스 안타까움을 지나 분통이 터졌습니다 도대채 왜 구하지 못하냐고 나도 세아이를 둔 엄마이기에 얼마나 울었습니다 평범한 한 사람인 나도 기억이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데 왜 저높은 곳에 계신 그분은 무었때문에 그날의 7시갼을 밝히는게 이리고 두려운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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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도안되는 사고가 있던... 2014년 4월 16일.그날은 제게도 정지된 시간중 하나였습니다.저희엄마는 4년째 암으로 투병중이시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의식조차 없으시던 때니까요..의식없는 엄마곁에서 간병을 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듣게되고... 계속 뉴스속 바다와..세월호 선미.. 그리고 유가족들... 하늘로 보낸 우리 아이들.. 가족들모습보면서.. 난.. 그래도 복받은거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난 그래도 엄마 장례식도 치룰수있었고. 난 그래도 엄마 마지막을 지킬수있었으니까요.집회가 시작되기전에도..이따금 엄마생각이 나면.. 광화문광장을 가곤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그때...우리 소중한 아이들이... 정말 이 말도안되는 정부때문에 이 말도 안되는 세상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게 너무 화가나고... 제 아이가 살아갈 이세상이 너무나 참담해서...정말아마... 절대 잊지못할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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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억이 안난다고 말할수있지학교정문 앞 건물 이층의 작은 밥집에서점심을 먹으면서 뉴스속보를 계속 보느라목이 아팠던것까지 기억이나는데하루종일 속보를 붙잡고 친구들과 가족들과아닐거야 다 구하겠지 다 살아돌아올거라믿어의심치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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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학교 수업시간에 배가 침몰되었다는 소식에 충격받고 결국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에 하루종일 멍했던걸로 기억합니다.믿을 수 없는 소식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걸까? 리는 생각을 몇십번을 하며 울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에 또 울었습니다.그리고..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저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에 참 슬프네요.절대 잊혀져서는 안될 중요한 7시간, 꼭 밝혀지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미안합니다..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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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저는 세월호를 타고있던 단원고 학생들과 동갑인 고2였습니다. 그 날이 전국 영어듣기시험을 치는 날이었어요. 보통 시험이 끝나고 바로 답지가 인터넷에 올라와요. 그래서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답지를 찾아본다고 핸드폰을 하나둘씩 쥐고 있었죠. 그 무렵 저는 공부하느라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제 친구들 몇몇이 실시간 검색어에 있는 세월호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처음에는. 전원구출이라는 뉴스도 있었고, 다행이네. 거기서 끝이었어요. 점심시간이 되고, 저녁시간이 되고 교무실에는 계속 뉴스가 켜져 있었어요. 그런데 계속 구조자 수도 바뀌고 이상했어요. 아니, 이상하다기보단 뭔가 무서웠어요. 아이들이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선생님과 시민분들이 피해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거든요. 그리고 그 주 내내 어쩌면 같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을지도 모를,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에 우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저처럼 안일했던 자신과 무능한 정부에 분노한 아이들도 많았어요. 2년이 넘게 지난 지금, 어쩌면 무능한 정부라기 보다는 무서운 정부라는 말이 어울릴 지금. 여전히 화가 나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2년 전부터 외쳤던 세월호 진상규명 이 네 글자가 이렇게나 청와대에 닿기가 힘든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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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구조라 했을때.. 다 살았구나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전원구조가 아닌 사망자가 늘어갈때 너무 가슴이 아팠다..ㅠ.ㅠ 아니.. 왜 구조 하지 않고 머하고 있는지 언론을 보며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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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수업 중 선생님을 통해 사고소식을 접했습니다. 전원 구조되었다고 했을 때 놀란 마음을 쓸어내렸고, 저는 하루종일 열심히 수업을 듣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수업들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납니다. 사회문화, 수학, 영어....등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원 구조라더니...다 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들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더럽고 추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평생 역겨운 죗값을 다하다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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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새며아침까지 게임을 하다 채팅창으로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그냥 별거아닌 사고인줄 알았다.당연히 구조될거라 생각했다.뉴스속보에서도 전원 구조라는 말이 나왔다.그럼 그렇지 하며.. 잠을 자고 오후 쯔음 일어났다..혹시나 해서 다시 켜본 tv속의 뉴스는 "경악"그자체였다.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다. 계속 뉴스를 집중해서 보았다.생존자수..사망자수..실종자수..보도는 온갖 혼선보도로 인해 아수라장이었다.최초 구조부터 모든게 이상했다.해경도,청와대도,언론도,선원들도왜 저렇게 무능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않았다.처음부터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걸 직감적으로 느꼈다.뭔가 숨길려는것을본능처럼 느꼇다.지금껏 세월호 관련보도는 항상 관심을가지고 지켜보고 원인을 찾아보았지만온통의문만 무성한채 할수 있는건 없었다.그뒤로 세월호 관련 보도와 뉴스로 아직까지분노하고 눈물흘리고 있다.차가운 바다아래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배의선수만 봐도 눈물이 난다.용서할수도 없고 절대 잊을수도 없다.동조하고 방조하고 기만했던 이들을죽을때까지 용서할수가 없다.그저 슬프고 미안하다.아무것도 할수 없어서 더 미안하다.. 이런 내가 할수 있는건 미약하나마언제까지 기억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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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4월 부터 새로운 가족을 맡이 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는 도중 사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현장 상황 인터넷 기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직장동료들과 사고를 공유하고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사내 카페테리아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습니다. 모두 커피를 들고 세월을 이야기 했습니다.모두 한 마음이였습니다.아이들이 무사히 부모 품에 돌아가길...직장 동료 모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그런 슬픈 하루였습니다. 얼렁뚱땅 일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남편과 한참을 티비를 보며 울었습니다. 그 4월에는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