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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 성신여자대학교 수정관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모두 구조되었다는 오보 때문에 안심하고 수업을 들었지만 수업이 끝 난 후 학식당에서 친구들과 보게 된 기사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구하겠지, 무사하겠지 라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내내 기사를 찾아읽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의 잠겨가는 배와 텔레비전 오른쪽 상단에 적힌 터무니 없이 적은 구조자수였습니다. 저는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다 무서워서 하루종일 티비 앞에 앉아 겉옷도 벗지 않은 채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맘 졸이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 아이들은 저 차가운 물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데 저는 학교가 다니기 싫다고 투덜대고 한탄하던 제 어리석고 오만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잊지 않을겁니다. 잊지 못합니다. 잊은 사람들은 반성해야합니다. 처절하게. 얘들아 미안하다. 기억하는 것 밖에 해줄게 없는데 그조차 못하는 어른들이 있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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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10시쯤에 옆자리 동료가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데요 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렇게 커다란 배면 침몰하는 것도 오래 걸릴테고 근해이기도 하고 모두 금방 구출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 쯤에 전원 구출 속보를 봤을 때도 당연하게 생각했었죠. 배에 대한 지식이 얼마 없어도 모두 구출되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아직은 당연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났을까. 오보라는 소식과 300여명이 갇혀 있다는 뉴스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 후 몇 일동안 단 한 명도 더 구해내지 못하고 펼쳐진 난리통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마지막 믿음까지 무너트렸습니다. 4.16은 그리고 그 이후의 몇일은 한 없이 잔인하고 잔혹한 희망고문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태와 거짓말들이 판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런 날을, 그런 날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사람 목숨보다, 자식 잃은 부모 심정보다 경제걱정을 더 하던 사람들은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못 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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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16일 선배들 수학여행소식에 마냥 부러워하며 수업을 하는도중 몰폰을 하면서 소식을 접하고 학교에서 수업도 안하고 미션스쿨이라 다같이 기도하며 살아돌아오길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전원 구조라길래 안도했는데 오보... 그리고 나타나지않는 대통령에 우리나라의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수학여행이 모두 취소되고 수업을하는 와중에도 모두 걱정에 뉴스만 보고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언니오빠들과 함께탄 선생님,일반인들까지 구조되지 못한 모두가 떠나버려서 엉엉울고 아직까지 기억하면 눈물난만큼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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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고1, 학교에서 언니오빠들이 차가운 바다속에서 사경을 헤메일때 저는 체육시간이었고,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전원구조되었다는 오보를 그대로 믿고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었고, 다시 교실의 티비를 트니 사망자, 실종자는 200명이 넘어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뉴스를 보며 언니오빠들의 소식에 애달파할때, 대통령 당신의 시간은 어디 가있었나요? 곧 스무살이 되고 투표권을 가질 나이가 될 열아홉인 지금, 이 나라에서 살기 싫습니다. 시국이 바로잡아지기전까진 "우리"나라라는 표현도 쓰고싶지 않습니다. 명심하세요 대통령님! 대통령 박근혜의 나라가 아닌, 내 나라 우리 나라에서 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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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울산으로 출장가던 아침 기차 안에서 뉴스로 접했습니다. 모두 구출했다는 뉴스를 보고 잠을 청했고, 출장지 도착 후 일을 마치고 저녁 뉴스에서 참사가 난 것을 알게되었습니다.당시 본인이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 하는겁니다. 보통 사람들의 기억은 특정 사건과 연관이 되면 더 정확히 기억을 하게 됩니다.그 시간에 본인의 행동을 모른다라.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제 가슴,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영원히 기억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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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 4월 16일 대학원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와서 포털 사이트를 무심코 보다가 사건을 접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 당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그날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착잡했던 느낌이 듭니다. 어두운 밤이 왔는데도 TV에서 보여주는 실종자수를 보니 백명을 훌쩍 넘긴걸 보고 과연 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당신 자식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웃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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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4월16일(수)오전에 담배피러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스마트폰에서 DAUM의 첫 기사로 세월호 관련 내용을 접했습니다. 그때는 전원 구조라는 기사였고, 안전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있어 300여명이 모두 구조된 것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지요.당시 서울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지방의 사무실로 근무지가 변경된 국장님이 서울에 방문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었고 1시부터 회의가 있다고 하셔서 일찍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11:50분 점심을 먹으로 지하로 내려가서 콩나물국밥집에 들어갔습니다. 국밥집 TV에서 나오는 영상에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국장님과 함께 TV를 보면 전원구조라니 참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회사 또한 그렇게 대응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일반인도 다 기억하는 사실을 그런 엄청난 일을, 그 당시 엄청난 일을 가장 가까이서 겪은 사람이 기억하지를 못한다. 어이가 없습니다.당신은 그 일을 잊을지 몰라도 우리는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동안 똑똑히 기억할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지우게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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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납니다..그날 회사 대표님이 오셔서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한일을 기억합니다..구내 식당이 아닌 차를 타고 멀리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밥을 먹으면서 티비를 보며 다 구조했다는 소리에 안도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몇백명을 다 구조했다고 하던데...왜 가라앉는 배주위에 구조선박이 조금밖에 없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던걸 기억합니다.당연히 구조했을거라 믿었는데... 뉴스가 설마 그런 일 에 대해서 오보가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애를 키우는 엄마로서 정말 슬프고 가슴아픈일입니다.그 7시간을 꼭 되찾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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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와 같은 출근 그러나 그날은 평상시와 달랐다 뉴스에서 나오는 속보 때문에 회사에서도 배사고났다고 서로 걱정 하며 이야기하고 뒤숭숭했던 하루 였다 하루종일 티비 뉴스만 봤던것도 그때가 처음이였다..그렇게 기억하는것이 7시간도 아닌 그날을 기억하시는분들이 많은데... 기억 못하시는 저기 윗분들은 평상시와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날이였나보다 저는 그날만 생각하면....아직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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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 병원식당에 내려가서 평상시와 같은 일을 하고제자리로 돌아와서는 하루 업무를 확인하고 뉴스를 보러 웹사이트를 들어갔었는데....믿을수 없는 뉴스로 멍하니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 그날을 기억합니다.잠시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접했을때는 안도를 하였다가 오후 부터는 아이들이 그때까지도 많이 배안에 있다는 뉴스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던 기억이 또렸하네요.지금은 외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지금도 몹시 분노를 느낍니다. 왜 기억이 안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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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5일 세월호 전날 고1이였던 저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후 밤 하늘을 보면서 하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달이 어느때보다 달이 붉은색이여서 신기해하였습니다. 다음날 자리가 창가쪽이여서 창문을 보고있었는데 2교시 교과 선생님이 배가 침몰했는데 전원구조 되었다고 말씀하신게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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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이었고, 대학원 수업이 3시 30분에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9시쯤 일어나서.. 전원구조 소식을 "봤습니다". 분명히 보고 학교에 도착했어요. 날씨는 맑았고.. 학교에 도착했는데 전원구조는.. 오보였습니다.세월호가 선미만 남기고 가라앉는 걸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시간짜리 수업이 끝나고.. 에어포켓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수학여행은 2박 3일이니까, 아이들이 구조되어 팽목항에 달려오고 계신 부모님 품에 안기면 2박 3일이니까.. 반드시 아이들이 살아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과 잊을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망각은 시간의 문제지만 기억은 선택의 문제니까요.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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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오전에 물리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평소 연락이 뜸하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야? 너 세월호에 탄거 아니지? 네 그날 세월호에는 저와 동명이인인 그리고 동갑인 박지영 이라는 선박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오전만 해도 뉴스를 보면 서 금방 구조되겠지 라며 사태에 심각성을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멈추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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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서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사고소식을 듣고 점심시간에 학생식당에서 YTN티비중계를 보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 수백명이 배안에 갇혀있다는 상황에서 그걸 티비로 보고있던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 다 말이 없었고, 훌쩍거리는 소리도 났었던 것 같다. 배 안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느낄 그 공포감에 감정이입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 카톡내용 등이 중계되는 걸 보면서 사실 구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릭 실제로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저녁에 집에 가는 길에 그것이 오보였다고..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고 너무나 황망한 마음으로 집에 가서 티비를 틀었고 결국 구조소식이 아닌 나쁜 소식만이 전해지는 뉴스에 울컥해서 아무일도 못했었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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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7년생, 세월호 친구들과 동갑입니다. 저희 학교는 핸드폰을 걷는 바람에 저는 친구들의 소식을 핸드폰을 받은 후인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몰래 핸드폰을 하다가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제 모습과 친구들의 모습은 닮아있어 힘들었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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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상태였어요.주사를 맞아야해서 억지로 아침에 눈을 뜬채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죠.처음에는 배가 침몰중이라는 속보가 떴고얼마 지나지않아 승객이 전원구조 되었다는속보가 바로 또 떠서 정말 다행이라며 가슴을쓸어내렸는데 완전히 잘못된 속보였죠.전 그날의 기분, 상황, 느꼈던 감정이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기억나고 느껴지는데왜 사라진 7시간은 기억을 못할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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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라이브를 보다가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뉴스에서 눈을 떼고 러브라이브를 계속 봤죠. 지금의 저는 그때의 본인이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러브라이브..다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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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출근준비하며 뉴스를 봤구요..세월호 속보를 보며...어떻게..이러고있는데 전원구조됐다는 오보를 보고 집을 나와서 직장에 출근했는데...10분여 정도 거리에 직장에 도착해 뉴스를 트니까 오보였다며.....분명 출근전엔 구조를 하고 있는영상과 배가 조금 기운상태였는데... 출근하는 잠깐사이에 배가 급 기울며 울며 방송을 보던 기억이 납니다...그때는 처녀였고 이제 한아이에 엄마가됐는데요....다시는 그 날의 일이 반복되지않도록....진실은 규명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힘을 보텔수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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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월호가 침올할떄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처음 뉴스를 보고 당연히 구조 하겠지 , 아니 이정도는 할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강의를 듣고 있는 와중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듣고 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허나 점심을 먹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때 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충격 받은 다음에 에이 구조 하겠지. 하겠지. 하겠지......저는 4.16날 이 나라의 얼굴을 마주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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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에서 군 복무 2년,KBS에서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 6개월.세월호 여객선이 뒤집혔다.뉴스에서 300명 넘는 사람들이 구출 되었다고 했다.해경에서의 군 복무 경험,KBS 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은전원 구출 보도를 믿지 못하게끔 했고,1시간 뒤 결국 거짓 보도로 드러났다.그 후 2년대한민국 정부의 무능과대한민국 대통령의 거짓과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횡포로대한민국은 걸레짝이 되었다.그들의 이익 관계에 맞물려300명이 넘는 무고한 국민이하늘로 가버렸고모든 이가 기억하는 것을그들은 아직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하지만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호 7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