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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뉴스속보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종편을 통해전국민이 배가 전복되는 현장을 지켜봤다.속히 구조될 줄 알았는데...무사히 구조될 줄 알았는데..그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별의 별 얘기가 많았다.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왜 구조하지 못하는지7시간만에 나타나서는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을 찾기가 어렵냐는 칠푼이 같은 말을 듣고 깜짝 놀랬다.왜 구조하지 못했는지, 왜 진실을 숨기려는지, 왜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는지그때는 몰랐다.단지 뭔가 있을꺼란 생각만 있을 뿐.아직도 미수습자가 있다.아직도 배가 그 자리에 있다.정말 몰랐다.박근혜는 대통령 껍떼기라는 걸.국가를 지들 대로 운영했다는 걸.대한민국이 이럴 줄 몰랐다.정말 나라가 이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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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70년 후반에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에 삼풍 백화점과 성수대교 사건을 생생히 보고 자랐고 20대 후반에 유럽으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세월호가 발생한 그 날은 평소 같이 회사에 출근했는데 아침부터 들려오는 참담한 소식에 일이 손에 안잡혔습니다저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그 가족들의 아픔이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그 후 한 두 달동안은 그 소식에서 벋어나질 못했던것 같습니다. 비록 멀리 나와 살지만 우리 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잊지 않고 살았는데 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보면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박근혜가 7시간의 행적을 자백하는 그 순간까지 이 날은 절대 절대 잊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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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고 남편에게 문자를 받았다. 큰일났어! 로 시작하던 그 문자. 곧 전원이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문자로 소식을 보내주었는데... 당연히 큰 사고가 되지않고 수습되겠지, 라고 믿고 직장인학교에서 하루를 여느때처럼 수업하고 아이들 지도하며 보냈는데....퇴근할 무렵쯤 배가 침몰 수준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짜 놀라 뉴스를 봤다눈 앞에 두고도, 다 알고도 구하지 못한 무력감....믿기지 않는 현실....누가 그것을 단순히 여객선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까그건 나의 사고이고 나의 고통과 공포였다그것은 언제라도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세월호는 내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것이다그 고통을 가늠하기조차 두려운 유가족들의 슬픔,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않고 추모하며 같은 인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그 아픔을 아주 좃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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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동포입니다.뉴스를 거의 안보는데 외국인 친구가 현지 뉴스를 보고 한국의 여객선이 침몰한다고 알려줬어요.뉴스 화면을 보니 사망자가 없다길래 다 구조됐나보다하고 별로 신경을 안쓰고 다음날 예정되어있던 멕시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인터넷이 호텔 로비에서만 겨우 터졌는데 밤마다 로비에 앉아 끊기는 화면으로 계속 한국뉴스를 봤습니다.골든타임안에 구해내겠지..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캐리브해에서 수영하고 스노클링하기에 물이 무섭고 끔찍해서 그리고 너무나 미안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우울해했어요.남편이 캐나다인인데 만약 이곳에서 그런 사고가 발생했다면 100프로 구조했다고..미안한 말이지만 그후로 한국이 얼마나 위험하고 말도 안되는 구조 시스템을 갖췄는지 한동안이나 제게 놀려댔었지요.이곳에서는 정치인들이 자국민의 보호나 생명을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 소중히 여깁니다.국민들은 국가를 그만큼 믿고 있구요.세월호 참사는 100프로 인재이고, 후진국스런 면모를 보여줬고, 국민들이 참고 넘어가서는 절대 안되는 일이었습니다.지금이라도 끝까지 파헤쳐서 직무유기한 사람들 중형에 쳐해야할것입니다.한국밖에서 바라다보는 한국 정부는 너무나 말이 안됩니다.권리를 포기하면 안됩니다.끝까지 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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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요.그날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점심이 되어서야 소식을 접하고 인터넷으로 속보를 보며 옆자리 직장동료가내가 숨이 막히는것 같아, 내가 서있는 여기 지금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 라는 말을 했습니다.이것도 기억나요.퇴근하는 길 버스에서 인터넷 기사를 보며 울었지요, 제 앞에 나란히 앉은 모자쓴 두 아주머니가애들이 그 배에 다 타고 있었담서?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들었습니다.아 이것도요.저녁준비를 하는 어머니가 뉴스속보를 틀어놓고 TV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어떻게 됐대? 계속 물었습니다 . 그날 저녁에 우리가족은 TV를 보며 칼국수를 먹었습니다.그리고 저는 그날 뉴스를 보느라 늦게 잤지요. 부디 아이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바라면서요.저는 그날의 모든것이 기억납니다. 심지어 저녁메뉴까지도요. 여느 평범한 날과 똑같은 날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어린 국민들을 위해 그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물론 분명히 어떤 노력이든 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의, 그리고 그날 스러져간 그 아이들의 대통령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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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습니다.오전이 다 지나갈 때까지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사라져간 것을... 출장을 가려 차에 올라 라디오를 켰을 때 알아습니다.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났는지 가슴이 떨려 운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저는 눈물바보가 되었습니다길거리를 웃으며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아도,.고1 이 된 딸아이의 학교행사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고 뉴스를 보면 가슴에서 분노가 솟아 오릅니다. 누군가는 트라우마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날의 일을 영원히 잊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요, 잊지 않습니다. 가슴이 너무 시려서...너무 아퍼서... 너무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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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전 회사에서 핸드폰으로 배가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봤습니다. 전원 구조라는 기사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업무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 식당에서 본 뉴스는 전원 구조가 아니라 배 안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뉴스였습니다. 회사 분들과 계속 인터넷 속보를 보면서 모든 아이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 날은 적어도 정부가 최선을 다해 구조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전원 구조가 힘들더라도 정부가 끝까지 단 한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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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날 뉴스를 계속보면서 출근을 하지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행동을 알지는 못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구조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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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했고, 동료들과 계속 세월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원 구조했다는 것이 오보였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간 부모님들이 찬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그럼에도 아이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만은 놓지 않았습니다. 스무해도 못 채운 아이들과 수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조 소식을 듣기 위해 계속 뉴스를 봤습니다. 혼자 구조된 어린 아이 소식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오빠가 구명 조끼를 주고 구조되지 못했다는 소식에 결국 목 놓아 울었습니다.생각하면 아직도 슬픕니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그 날을 생각하면 슬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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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합니다.애도할수 있는 자유로 우리곁을 떠난 그들과 남겨진 우리를 위해 마음껏 슬퍼합니다.그리고 비로소 한발 앞으로 나아갈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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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을 기억합니다. 오전 내내 일하느라 인터넷을 보지 못한 채 점심식사를 하러 가던 중 세월호가 침몰중인데 다행히 전원 구조되었다는 얘기를 동료에게 듣고는 "참 다행이다"했는데 저녁시간에 이런 비극이ㅠㅠ ... 참 나쁜 대통령과 나쁜 사람들.. 왜 기억이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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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처음 뉴스를 접하고 그날 이후 너무나 큰 슬픔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자리잡고 있었나봅니다. 그날 이후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우리 아이의 얼굴을 한없이 보고 또 보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린적이 수없이 많았는데...또 눈물이 나네요....결코 잊지 않을겁니다..... 꼭 7시간의 비밀을 끝까지 찾아내서 박근혜와 그 일당들을 천벌을 받게끔 해야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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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기억을 지울수 없습니다. 4월 16일 오전... 저는 논문 심사로 인해 밤을 세웠고 뉴스를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심사 전에 잠시 짬이 나서 배가 침몰했으나 전원 구조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별일 아니구나 했었습니다.. 하지만 심사 이후 탑승자 수나 구조자수... 계속해서 다른 수치가 발표가 되고 아직도 학생들이 차가운 물속에 있다는 기사가 계속해서 올라왔지요... 도대체 그날 윗분들은 뭐하고 있었는지... 국민들은 빨리 구조를 원하고 있으나 윗분들은 그렇지 않은 듯한 행동들.. 그러고 나서... 학생들이 부모님 또는 자매형제들에게 보낸 문자들이 공개 될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미안해.. 사랑해.. 보고싶어... 등등등어찌 이런 문자를 보고도..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이번엔 제발.. 희생자들이 살아돌아올 수 없더라도 편안히 눈 감을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250만의 촛불이 5000만의 촛불로 번져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우리모두 지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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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남양주시 오남읍에 있는 서일대학평생교육원에서 세용형,윤기 셋이 캐치볼과 펑고를 받았습니다.휴대폰으로 진도부근에 선박이 좌초 됐다는 속보가 띄워져 있었습니다.전원 구출 했다는 뉴스를 보고 다행이다 했지만 집에 와보니 오보였고 배가 가라 앉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글썽 거리면서 안타까워 미친줄 알았습니다.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기득권이 없어지길 바라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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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점심을 먹으려고 동료들과 만났죠.남편이 애들이 탄배가 침몰했다고 문자가 왔어요. 회사 TV를 보는데 전원 구출이라고 나오더군요... "아 다행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니더군요... 어떻게 그 날을 그 시간을 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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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 이후 첫 출근날입니다. 아침에 회사가는 버스안에서 처음 tv로 보고 회사에 와서도 안절부절하며 뉴스를 봤습니다. 그리고 4.16일은 첫출근날이며 잊을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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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새벽기도를 마치고 8시경 학교에 출근했다.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여느때와 다름없었는데... 그 때 세월호 사건을 접했다.중3학생들도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그늘의 충격은 매우 컸다.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구출되길 기도했었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그 날 이후 나는 수학여행에 학생인솔차 집을 비울 때 현관 앞에서 가족을 가슴에 꼬~~옥 안아준다. 세월호 침몰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가슴엔 아직 차가운 팽목항의 바닷물이 넘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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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약속이 있어서 동네의, 지금은 없어진 칼국수 집으로 나가기 전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었다. 뉴스 메인에 뜬 여객선 침몰. 1명 사망, 전원 구조. 돌아가신 한분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나머지 승객들이 모두 구조됐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컴퓨터를 끄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유일하게(?) 돌아가신 그분이 얼마나 억울하고 그 가족을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무심히 대화를 나눴다. 다. 뒤늦게 도착한 지인이 "다 구조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어요" 라고 했을 때도 몇면 분들이 구조가 안 됐구나 정도로 무심히 넘겼다. 당시 나는 아직 스마트폰을 쓰지 않았기에 외부로 나가면 뉴스와는 완전히 차단이 된다. 때문에 집에 돌아와 다시 컴퓨터를 켰을 때의 충격은 정말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말로 표현을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 그 시간을 지켜봤던 우리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야할 것 같다. 국민들이 전혀 가질 필요가 없었던 상처와 죄책감을 안겨준 무능한 집단이 가장 상처도 죄책감도 없다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의 2014년 4월 16일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와 믿음마저도 다 거둬가 버린 날. 더불어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얼마나 바닥까지 추락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는 알게 해준 날로 기억된다. 그래서 잊지 못 한다. 그리고 용서도 안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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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2014 .난 무엇을 했었나?전날 아들 생일이라서 축하 파티 해주고다음날 출근 준비중 인터넷에서세월호 침몰 이라는 뉴스를 보고그다음에 전원구조 라는 자막을 보고울 나라는 대단해.. 하면 서 맘편하게 출근 하던 기억을 어찌 제가잊나요... 전원구조 라는 오보를 어떻게 평생 잊을까요?지금도 바다를 가지 못하고배를 타지 못하는 세월호의 아픔인데..잊지 않겠습니다.진실이 밝혀지고 제가 바다로 나가배를 다시 탈수 있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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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9.11 테러를 직접 목격 했을때도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지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월호가 침몰한 그날 밤 이상하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집으로 돌아오며 그 다음날이라도 기적적으로 아이들이 구출되는 소식이 있기를 기대했었고,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그런 소식이 뉴스를 장식하기를 기대하며 인터넷을 뒤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도 기억하고그리고 제가 죽을때 제 인생을 돌아보며 떠올릴 몇가지 사건중 하나가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기억해 나갈것이기 때문입니다. 4.16은 제 인생을 그리고 우리 나라역사를 그 전과 그 이후로 나누게 된 중요한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