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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제가 좋아하는 가수의 티켓팅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전원구조가 되었다는 뉴스만 보고 티켓팅에 빠져 아무 생각없이 친구들과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피씨방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전원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매일 매일이 ... 미안합니다. 아직도 아이들과 일반인 희생자분들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래서 잊지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평생을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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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양수업시간에 아이들끼리 네이버 뉴스를 보며 처음 기사를 접했습니다. 배가 침몰했다는 기사와 전원 구조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안심하며 수업을 다시들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오는 길에 기사에서는 그것이 오보라는 기사가 떴었고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티비를 틀어놓고 보고계셨습니다. 보험금을 보도하는 티비를 보며 참담함과 뭐라 표현할수없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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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과제에 지쳐 하루를 꼴딱 새운 후 꺼벙한 눈으로 아침 수업 발표 준비를 하던 그 시간,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진도에서 사고로 배가 가라앉고 있으나 모두 구출되었다고했다. 가족 중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 고등학생이 있다면 연락해보라고. 우리는 승객들이 모두 나왔으니 안심하고 한편으론 무심하게 그것 참 다행이네요! 했었다 집에 와서 본 뉴스와 기사는 끔찍했다아이들은 나오지 못했고 무거운 배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그럼에도 반드시 구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몇시간 뒤 완전히 가라앉아 작은 섬처럼 보이게 됐을때까지도... 미안해 얘들아,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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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겠다 호언장담하고 홀로 상경한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차게 식은 침대에 누워 컴컴한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소식은 뒤늦게 알았다. 전원 구출이란다. 그렇구나, 했다. 그러다 정정 보도를 봤다. 아직 나오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란다. 그때부터 불을 켜고 앉아, 변동없는 기사를 새로고침하며 구출 소식을 기다렸던 것 같다. 실종자 대부분이 어린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던, 저보다는 남을 먼저 구하려고 애썼던 아이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고 나는 한참 숨죽여 울었다.나는 죽을 때까지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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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뉴스로 소식을 접했을때 모두 구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말 안심했는데...오보라는 소리듣 듣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고 그 후에 유가족 분들이 슬퍼하는 모습보면 내가 많이 도와줄수 없는것 같아서 너무 슬퍼서 아직도 먹먹해..하지만 나는 잊지 않을거에요언제나 항상 그 분들을 응원하고 아이들을 잊지 않을거에요 걱정하지마요 우리들 마음속에 언제나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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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생이었습니다. 시험이 3일 남은 날이었습니다. 곧 시험이라 일찍 일어나 책을 보다가 아침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제주도로 가던 배가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모두 구조되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고 와 정말 다행이다 아이들이 많이 놀랐겠다 나도 고등학생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창 공부를 하다가 점심을 먹으며 뉴스를 보는데 아침에 봤던 뉴스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내내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었습니다. 아이들 얼굴들이 떠오르고 그저 눈물만 났습니다. 그때 저에게 며칠 후 시험인 사람이 그런데 관심이 가느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아이들에 대한 알 수없는 죄책감 등등으로 며칠을 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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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기분 좋게 먹고있는데 뉴스 속보가 나오더라고요.세월호가 침몰했대요.그 땐 심각성을 몰랐어요.그저 무슨일이야, 어떡해, 저렇게 큰 배가..이정도의 걱정뿐이었죠.주위의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이었고 큰 배가 침몰했다는게 와닿지 않았어요.그 배에 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몰라요.점심을 먹으면서 뉴스를 계속 보는데그 큰 배가.. 점점 기울고 가라앉더라고요.그런데 제가 점심을 다 먹는 순간까지 구조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어요.회사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퇴근을 할 때까지 집에 돌아와서까지도요..제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는 시간동안 금방 다 구조될 줄 알았던 세월호 탑승자들은 그 큰 배와 함께 가라앉고 있었어요.그 누군가는 7시간동안 그림자하나 보이지 않았고요.정말 평범했던 일상을 보낸 날이었는데잊을 수가 없는 날이되었어요.직접적인 고통을 겪은 것도 아닌데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요.저도 이렇게 힘든 날인데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오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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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이였다. 내또래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근데 사고가 났다고 한다. 별 큰 걱정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아직도 사고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이게 큰일이란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한명한명 구해질때 마다 모두가 살아왔으면 했다. 뉴스에선 신기술로 공기를 주입해 살아날 가능성이 몇퍼센트로 증가한다고 했다. 정녕 그런건지는 확실이 모르겠었지만 친구들이 살아 돌아오길만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결국 3일이 지나고 돌아오는건 차가운 친구들이였고 나는 눈물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난 그 후 대학생이 되고 누군가는 이제 잊을때도 됬다고 과거에 묻혀 살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걸 잊는거자체가 말이 안된다. 평생 가슴속에 살아야 한다. 기억은 기쁘거나 슬퍼도 가지면서 기억하여야 사랑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아 난 널 한번도 잊은 적이 없어. 친구들아 얼마나 차가웠는지 나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겨울보다 더 춥고 힘겨웠을 거라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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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학교가려고, 부모님은 회사가려고 분주한 가운데 그냥 켜둔 뉴스에서 세월호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지. 학생들이 많이 탑승했는데 전원 무사 구조라고 속보가 나오고 있었어.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왔지. 저녁때 다시 뉴스를 보니까 그게 아니래 오보였다는거야. 아니 어떻게 저런걸 오보로 내보낼 수 있지? 그럼 현재 상황은 어떤거지? 하면서 뉴스에 귀를 기울였더니 너무 상황이 무섭고 안타까운거야. 학생들 대다수가 배 안에 갇혀있고 구조 작업을 하기에 물살이 센 곳이라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그 이후로 하루하루 뉴스를 열심히 봤는데 너무 우울해지더라. 내동생도 어린 나이여서 아직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몇번이나 더 참가해야하는데 혹시 저런 사고가 나면 어쩌나... 우리나라는 후속 대응이 너무 미비해서 사고나면 피해자는 아무런 대우를 못받는구나. 국가와 싸워서 권리를 찾아와야 하는구나. 국민들이 도와주고, 민간 잠수부들이 도와주는데 국가는 뭐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글을 쓰고있는 16년 12월 9일 현재까지도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았고, 아직도 못찾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꺼야. 다행히 오늘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어.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우는 기사 사진을 보았지. 그 분들의 마음을 나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얼른 7시간의 비밀이 풀리고 세월호 유가족분들에게도 다시 행복이 찾아갔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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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인천버스터미널에서 처음 뉴스를 보았다.분명 모두 구조하엿다고 햇다. 아직도 그 큰 빨간색 박스안에 잇던 모두 구조하엿다는 뉴스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뉴스는 거짓이엇고 생존자는 거의 없엇다...우리나라국민들은 나라를 믿지못하여 안전불감증이 커졋고 그와중에 일베나 소수단체는 세월호시위를 보며 조롱하였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할수잇던건 묵념과 그들을 위한 랩몇마디였다. 세월호사건은 잊으면 안되고 잊혀지면 안된다. 세월호는 모든 국민들에게 일어날 수 잇엇던일이며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죄값을 받지 않고잇다. 정부는 제대로 사과하고 모든 국민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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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중간고사기간이었어요첫 시험날인데 학교가기전에 사고가났고 전원구출되었다는 속보를 보고 별일아니구나 하고 집을 나서서 시험을 봤습니다한 과목 끝났다는 마음에 치킨을 사들고 집에서 티비를 켰는데 전원구조가아니라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어요그리고 그 후 몇달은 우울감에 허덕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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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영어듣기평가를 할때는 매번 핸드폰을 걷었다. 그날도 핸드폰을 걷었다. 처음은 티비 속보였다. 분명히 다 구했다고 했다. 학생인원수도 써있었다. 단원고쪽에서 온 애들이 핸드폰을 돌려받아 전화를 걸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때서야 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점심때까지 전화가 안되자 친구하나가 울기시작했고 우리는 그애를 달랬다. 정신없어서 못받을거야. 다 구했다고 했다. 전원 구출이라고 들었다.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뉴스를 믿은 내 자신이 멍청하고 어리석은사람이였다. 내가 바보였다. 희생자 명단에 이름이 뜨기까지 그애가 살아있으리라 믿었다. 내 친구는 아직 열여덟살에 멈춰있고 나만 스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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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있는 단원고가 아닌 모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고3 학생이었고, 단원고 학생이 탄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우리나라에서 사고가 일어난 이상 애들만 불쌍하게 되었다. 구명조끼 100개나 있을까? 어떻게 됐대?" 함과 동시에 친구가 "전원 구명조끼를 착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행이라는 맘에 눈물이 났고 단원고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떨리는 맘을 가라앉히고 수업을 듣는데, 오늘(박근혜 탄핵 가결)처럼 핸드폰만 수시로 새로고침 하면 할 수록 구조자의 수가 줄었다. 점점 내 말이 씨가 되어감이 느껴졌다. 그런 말을 내뱉은 나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세월호에 탄 지인과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한시간 두시간 지날수록 현실이라는 것이 와닿고. 친척분들의 괜찮냐는 끊임없는 전화가 걸려오고. 배에 타지 않은 내가 혼비백산이었던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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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어학원을 끝내고 집에서 한가롭게 인터넷을 보던중에 이 소식을 접했고 곧 전원구조라는 기사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옥의 시간이였다. 아이들은 나오지 못했고 나또한 멀리서 기사밖에 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못했고 수학여행길에 즐거웠을 아이들의 생각이 계속났다. 무력했고 비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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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피시방으로 알바를 다니던 그때,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했는데 사장님은 카운터안에서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지.그리고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뜨고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오보였다는 속보가 다시 모니터에 나타나고 점점 가라앉는 세월호가 보이는 모니터를 보며 사장님은 소리없이 한참을 숨죽여 우셨지.사장님 자녀들이 비슷한 나이 또래여서 더 그랬을까하루는 큰사장님이 울고 계시고 다음날은 작은사장님이 울고계시고..하루하루 시신을 발견했다는 뉴스들을 보면서 몇시간씩 카운터에서 우셨어.그날을 정말 잊지 못할것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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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친구와 메신저로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을 나눴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어요.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이 오보라는 것을 알았고, 시간이 지나도 늘어나지 않는 생존자수를 보며 너무 무서웠어요. 이게 현실이라니? 실종자가 몇 백명이라니? 더 이상 생존자가 늘어나지 않는다니? 내내 화면 위에 작게 떠있던 실종자/사망자/생존자 수가... 생존자는 늘어나지 않는 그 화면이 너무.... 절망적이었고 믿고싶지 않았어요.배가 점점 기울어서 가라앉는 모습, 물살이 빨라서 구조대가 접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재난 컨트롤타워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동안 아무 말 없었던 대통령..... 내가 사는 나라가 이렇게까지 싫어지기는 처음이었어요. 대통령의 무능력함이 치가 떨리게 싫었고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모두가 원망스러웠고 한없는 절망을 느꼈던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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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전, 나는 친구와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아침 컴퓨터 뉴스의 긴급속보를 통해 여객선이 바다에 침몰되고있으나 모든 탑승객들을 구조중이고 곧이어 구조가 완료 되었다고 기사를 접한 후 친구와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중간지점에 다다랐을때 한 매점의 TV를 통해 전원구조가 아니라 사망자와 실종자가 구분되어있는 자막을 보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분명 구조했다고 두눈으로 똑똑히 기사를 보았는데.. 그럼 대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두가 1년의 모든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자전거여행을통해 세월호 사건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전거를 타기 전 기도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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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이 욕조 속 깊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들은 천천히 깊은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갔고 한번 떠올라 안도했는데 다시 깊이 가라앉아 꿈에서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파 고통스럽게 깨어났습니다. 그날따라 뉴스를 보지 않은 통에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낮에 놀이터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늦게서야 남편으로부터 세월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계속 티비 앞에서 마음을 조렸습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화가 났습니다. 시원스럽게 최선을 다해 구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화가 났습니다. 핑계만 대고 일부러 구조를 늦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화가 나고 답답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꼭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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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접하고 일주일동안 공부도 잘 안되고 뉴스만 찾아보면서 엉엉울었던 기억이 납니다.유가족들 모습을 보는데 너무 안타까운 마음과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정부의 모습이 너무 화가났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네요 2014년 4월 16일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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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억합니다.우리가 어느 평상시의 날과 다를게 없었던웃고 떠들고 친구들과 재밋게 수업을 받던하나의 일상이엿던 날에나와 나이가 `한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형,누나들을 비롯해 일반인,승무원이 배에 갇혀잇다는건 솔직히 그때의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엿습니다.마음을 졸이며 어느 때와 똑같이 학교에 갔는데한 선생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하셧습니다.선생님께서는 아이를 키우시고 계시는데 너무 공감이 되서 우시나 저도 울컥 슬픔이 몰려 왓던 날 이엇죠그런데 뉴스에서 골든시간은 존재한다, 구할수 있다, 구햇다 라는 말이 나왓을때 안심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보였죠 정상적인 선장이엿다면..적재물을 많이 안실엇더라면..가많이 있으라고 방송을 안햇더라면..수학여행을 가지 않앗더라면. 물론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죽을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거스를수 없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연에 막을수 있엇던 살릴수 잇엇던 사건 아닐까요?왜 인간은 사건이 터지고 나서 후회를 할까요? 아니겟지. 이정도 실어도 문제 없겟지. 언제나 우리 한국은 안전불감지대인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더불어서 구하려다가 돌아가신 승무원,민간 잠수사분들의 노력에 애도를 표하고 기억합니다.여러 정황을 모아서 그때 상황을 보면 단순 사고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 선장? 배과적? 등등을 종합해보면 참.. 선장과 그 외 유병언에게 관심이 쏠려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죽엇다는데 시국이 이런 상황에 정말 죽은건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런데 슬픔을 뒤로하고오늘날 대통령과 더불어 속속히 의문이 현실이 되가고 있고 오늘 드디어 탄핵이 의회에서 통과되엇습니다.하물며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대통령이 언제나애매모호 하고 그냥 답이 안보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조차도 이런데 다른 재력가들 눈에 안보이는 비선 상상조차 되지도 않습니다. 억울하게 꽃다운 나이에 떠나 사람들 세월호 유가족분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더 나은 대한민국의 내려 올사람은 내려오시길 바랍니다. 권력과 돈에 눈에 멀어 한순간의 결정이 당신뿐만아니라 다른 이에게 미치는 당신은 권력있는 사람입니다.